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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택 May 02. 2021

손자 자랑 값 5만 원



동생이 모처럼 주말에 시간을 비웠다 하여 어버이날 겸사해서 둘이서 할머니 댁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는 동생을 보며 파안대소를 터뜨리시는 할아버지를 보니 데리고 오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모시고 가서 근사한 점심 한 끼를 사드리려고 했으나 부쩍 늘어난 서부경남의 코로나 확진자로 인해 그냥 간단하게 짜장면을 시켜 먹자고 하셨다. 짜장면을 시킨 지 1시간이 지나도록 음식은 오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오랜만의 근황 토크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OO 당 약방 영업하는지 전화해봐라"



"저 영감은 굳이 일요일 주말에 약을 찾노? 어휴.. 따르릉, 거기 OO 약방이지요?"



할아버지는 최근 팔과 손목이 너무 저려서 통증을 가라앉히는 약을 처방받고 싶어 하셨다. 굳이 주말에 약방을 가려는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할머니지만 매일 집에만 계신 할아버지 바람 좀 씌게 해 드리려고 내가 모시고 다녀온다고 했다. OO 당 약방은 할아버지의 오랜 벗이 영업하는 시골 약국이다. 어릴 때부터 아빠와 함께 몇 번 인사드리러 간 적은 있지만, 근 몇 년간 방문한 적은 없어서 할아버지 덕에 나도 오랜만에 약방을 방문하게 되었다. 허리가 안 좋아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자세로 마중 나와 있는 약방 할아버지가 보였다. 두 분은 꼭 잡은 두 손을 연신 흔들며 서로 잘 안 들리는 귀 때문에 우렁찬 목소리로 그동안 못 나눈 회포를 푸셨다.



"너 인철이 죽은 거 아나?"



"뭐 인철이가 죽었따고?? 언제?!"



"3개월 전에 죽었다!"



"그래? 그래 뭐 갈 때 되었지!!"



"이제 너랑 나랑 연호 셋이 남았네? 하하 하하"



"하하하하하"



이것이 바로 연세 90 넘은 할아버지들만이 할 수 있는 생사 드립인가? 삶과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이른 나이의 대화는 실로 놀라웠다. 할아버지는 즐겁게 몇 분간 대화를 나누시다 팔과 손목이 저려 약을 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더니 약방 할아버지는 손목의 맥을 짚더니 약방 할머니를 불러 무슨 무슨 약을 가져오라고 시키셨다.



"이 약 이게 좀 비싼데 효과는 직방이다 아이가"



"이기 얼만데?"



"5만 원이다"



"50만 원이라도 나으려면 사야지 으하하하"



"으하하하"



그렇게 할아버지는 미국제 영양제 같은 약을 한통 사시더니 이제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온 김에 좀 더 놀다 가라는 약방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손자도 좀 있다 빨리 집에 가야 한다며 약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차로 15분 정도를 이동해 할아버지 집에 왔다. 할아버진 집에 오자마자 약통을 그냥 식탁에 툭 던져 놓으시곤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할머니가 내게 슬쩍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 별로 아프도 안 한데 손자 자랑하려고 일부러 약방 간 거다"



딱히 주말에 약국을 가자는 것도 이상했고, 갑자기 오늘 나를 보며 손과 팔목이 저리다고 하는 것도 결국 약간의 꾀병을 빙자하여 나를 친구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고 싶어 간 것이다. 결국 할아버지가 지불한 약값 5만 원은 흔히 '자식 자랑하려면 돈 내고해라'라는 일종의 밈을 수행한 것이다. 언제나 할아버지에게 나와 동생은 주변에 자랑하고 싶은 존재인가 보다.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오늘 또 한 번 상기되었다.










동생이 싸구려 마스크 쓰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허접하다며 가져가라고 준 마스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할배 이거 농약 칠 때 쓰는 거 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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