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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택 Oct 17. 2021

퇴근 시간을 건든 자의 최후

 다음 주 일본 본사에서 안전 관련 감사를 온다고 한다. 중역들과 팀장들은 회의를 소집하며 제법 분주해 보였다. 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다 보니 안전 관련해서는 정말 철저히 관리 감독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압박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군대 시절 막사에 사단장이 방문한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진짜 해야 할 일을 뒷 전에 두고 생전 하지도 않던 치약으로 바닥을 미싱 하거나, 페인트 칠을 하고, 대청소를 하게 되니 말이다.


 실제 회사 내에서도 군대 막사만큼이나 신경 쓸 것이 많았다. 불에 타기 쉬운 종이 박스가 있으면 안 되고, 멀티 탭은 바닥이 아닌 옆으로 향해 있어야 하고, 개인 선풍기나 전자제품이 있으면 안 되고, 도면이나 보안에 중요한 서류들이 눈앞에 있으면 안 돼 었다. 그렇게 개개인의 정리뿐만 아니라 사무실 전체가 대대적인 대청소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연구소 총무 파트에서 메일 한통이 날아왔다.



금일 전 팀장의 설명 및 별도의 전개가 있을 예정입니다만

1차적으로 사무실 내 전체적인 3정 5S 및 대청소를 실시합니다.

적극 협조해서 실시를 부탁합니다.

1. 실시 시간: 5/31(금) 오후 04:30~05:30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시간을 내어서 사전에 조금씩 정리를 해 주십시오.

   (각 팀별로 팀장/파트장이 별도 지시를 부탁합니다.)

2. 주요 정리 시행

3. 차후 "안전" 관련한 활동이 지속 실시될 예정입니다. 안전(환경)에 대한 의식이 정착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 요망합니다. 이상 감사합니다.



메일을 읽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동료들도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왔다. 사무실이 웅성 웅성 거렸다. 종업원들의 불만은 이러했다. 금요일, 그것도 퇴근시간이 지난 업무 이외의 시간에 대청소를 시키는 게 말이냐는 것이다. 주간에 할 일은 다 시키고 퇴근 이후에 또 다른 업무 지시를 내린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금요일이면 각자 고향으로 가는 사람도 있을 거고 선약이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원성이 자자했다. 높으신 분들이 종업원을 대하는 태도와 근로 문화에 대한 마인드가 여전히 구식이라는 것에 한숨만 나왔다. 그리고 한 10분이 지났을까? 이어서 또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ボデー技術室 長友です。

BD기술실의 나가토모입니다.

いつもお世話になっております。

늘 신세가 많습니다.

勤務時間を超えた作業時間の設定はやめましょう!

근무시간을 초과한 작업시간 설정은 하지 맙시다!

またその時間に別の会議があるのでP長以上が不在となります。

또 그 시간 다른 회의로 P장 이상이 부재중입니다.

この時間で怪我等事故があると困りますので、

이 시간에 부상 등 사고가 있으면 곤란하므로,

今日のAM中に実施してください。

오늘 AM 중에 실시해 주십시오.

以上です。

이상입니다.



 이 메일을 받고 동료들끼리 서로 소리 없는 고요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도 통쾌한 사이다였다. 괜히 저 메일을 보낸 기술 총무 팀장이 머쓱해 보여서 괜히 우리가 눈치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역시 글로벌 대기업 본사 직원은 틀리다며 감탄했다. 단순히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는 것인데도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더군다나 업무 이외의 시간을 건드는 걸 지적할 수 있다는 것도 한국 책임자가 아니라 일본인, 즉 외국인 책임자라 가능한 것이다.


 가끔 우린 가장 기본적인 것을 보장받는 것에도 정말 고마워하고 눈치를 보고 있다. '수요일은 가정의 날이니 빨리 퇴근하세요' 하고 생색내는 것도, 우리가 감사해하는 것도 웃기고 말이다. 이 수직적이고 유연하지 못한 근로문화를 뿌리 뽑기란 정말 쉽지 않다. 이것은 나의 세대가 점점 관리자 및 책임자로 올라가는 이 시기에 후배들과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바꿔줘야 할 문화임엔 틀림없다. 그리곤 이어서 메일 한통이 더 도착했다.



금일 오전 중에 실시합니다.

 11:30~12:30

이상 감사합니다.



내가 살다 살다 일본 사람에게 감사해하고 존경심이 드는 경우가 오타니 말고 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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