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와의 연애가 완연히 무르익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묵직한 단어가 대화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가보지 못한 곳도 수두룩했다.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그런 자유들이 필연적으로 줄어들 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 한켠이 시큰거렸다. ‘언젠가는 하겠지’ 싶은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그 시점이 ‘지금’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시절 봉사활동으로 인연이 닿았던 형님, 그리고 몇몇 동기들과 술자리를 갖게 됐다. 그날도 내 특유의 ‘자유론’을 거침없이 펼치며, 결혼에 대한 고민을 술안주 삼았다. 한참을 떠들던 내게, 그 형이 딱 한마디를 건넸다.
“놀고 배우고 싶은 건 나이 먹어도 끝이 없다. 그거 다 했다고 결혼할 거 같아? 그냥 결혼을 위해 멈추는 거야.”
그 순간, 자유 타령하던 내 입이 툭 하고 다물어졌다. 결혼을 미뤄온 이유가 사실은, 아직 다 누리지 못한 자유와 놓치기 싫은 욕심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결혼이란 건 그 모든 걸 기꺼이 멈출 수 있을 만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하는 거라는 것. 미처 보지 못했던, 나를 오랜 시간 묵묵히 기다려준 여자친구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결혼이 내 욕망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감정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결혼을 결심하게 만든 건, 거창한 상담도, 영화 같은 사건도 아니었다. 그저 술 한잔 곁들인 자리에서, 딸 가진 형이 무심히 던진 한마디였다. 그 형은 아마 지금도 자기가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 할 거다. 철없이 망설이던 나를 보며 그냥 답답해서 툭 던진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조언’이라는 건, 말을 건네는 사람의 의도보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와 마음가짐에 따라 진짜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
멜로가 체질인 아내는 이 얘기가 결혼 결심의 순간이었다고 하면 감동 없다고 꼭 구박한다. 여보, 미안. 나는 멜로보다 리얼리티가 체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