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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 아래 남은 마음

by 온택

초등학교 때까진 ‘성적’이라는 말이 남의 일 같았다. 놀고, 먹고, 뒹구는 게 전부였고, 시험은 그냥 학교 행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중학교 첫 중간고사. 처음으로 ‘성적표’라는 걸 받았다. 과목별 점수와 석차가 빼곡히 적힌 그 종이를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 당황스러운 건 담임선생님의 한마디였다.


“성적표는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도장 받아오세요. 상담 내용도 꼭 적어오고요.”


그날 집에 와 성적표를 꺼낸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차마 아빠에게 보여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묘수를 떠올렸다. 필체가 유독 ‘노인체’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부탁해 성적표 하단에 ‘부족한 부분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문구를 적게 했다. 도장은 엄마 화장대를 샅샅이 뒤져 아빠 도장을 찾아내 또렷이 찍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기말고사. 다시 위조, 도장. 그런데 이번엔 이상했다. 화장대를 열자마자, 그 도장이 한눈에 보였다. 마치 일부러 꺼내둔 것처럼.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그건 아빠가 일부러 꺼내두신 거였다는 걸. 아무 말 없이, 내가 감추고 싶어 한 마음을 다 알고 계셨다는 걸. 그때 아빠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실망이었을까? 안쓰러움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어린 아들이 주눅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속이 타들어가셨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성적표가 내 인생을 좌우하진 않았다. 4년제 대학을 나와 꽤 괜찮은 직장도 다니고, 가족도 꾸려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그땐, 그렇게 조마조마했을까. 아마도 그 시절의 나는, 점수나 석차보다 더 무서운 게 ‘누군가의 기대를 져버리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성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점수도, 석차도 아니다. 그 조용히 꺼내둔 아빠의 도장, 아무 말 없이 내 마음을 알아준 그날의 따뜻한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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