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점 없는 순간들

by 온택

영화를 고를 때마다 괜히 신중해진다. 휴대폰을 열어 평론가 평점을 훑고, 관람객 리뷰를 샅샅이 뒤진다. 시작도 전에 내 감상은 이미 남들이 남긴 별점 속에 갇혀버린다. 그러다 보니 보기도 전에 포기한 영화가 꽤 많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영화는 곧 존재하지 않은 영화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들은 정작 내가 고른 적이 거의 없다. 대학 시절,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던 길이 떠오른다. 앞좌석 모니터에서 강제로 재생되던 액션 영화. 처음엔 시끄럽다며 이어폰을 꽂았지만, 옆자리 아저씨가 킬킬거리며 웃는 바람에 결국 나도 모르게 스크린에 빨려 들어갔다. “이런 걸 왜 버스에서 틀어주나” 투덜대던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어느새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경험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선택지가 없으니 잡념도, 비교도 사라졌다. 평점이 몇 점인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봤는지 따질 여유도 없이 그저 눈앞의 스크린에만 몰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편한 제한이 오히려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어주었다.


반대로 요즘 OTT를 켜면 사정은 달라진다. 수천 편의 영화가 내 앞에 줄지어 서 있지만, 그 자유가 오히려 나를 방해한다. 고르다 지쳐 결국 아무 것도 보지 못하거나, 어렵게 고른 영화를 보면서도 “이 시간에 다른 걸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따라붙는다. 결국 영화는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고, 남는 건 허무와 피곤뿐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뿐만 아니라 내 일상도 비슷하다. 선택지는 늘어날수록 만족은 줄어든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앉혀놓고 보게 된 영화가 오래 남듯, 삶에서도 계산 없이 불쑥 찾아온 순간이 더 진하게 각인된다. 준비하지 않았고, 계산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오래 마음속에 남는 장면들.


결국 영화란 얼마나 잘 고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몰입하느냐의 문제였다. 별점도, 스킵 버튼도 없는 단순한 두 시간. 그때서야 비로소 영화는 살아 움직였고, 나 역시 온전히 관객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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