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학교든 교외든 행사든 어디선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자 라고 하면 한시도 빼먹지 않고 적어두는 항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메이저 리그 직관'이다.
나의 유년시절은 박찬호와 함께 했다. 야구를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택에 자연스럽게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경기 중계를 챙겨 보았다. 처음엔 야구를 보는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다. 공 하나하나에 엉덩이가 들썩 거리고 간혹 구원 투수가 박찬호의 승을 날려 먹는 날이면 아버지의 육두문자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전 세계 최고만 모이는 메이저리그의 중심에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선수의 활약은 애국심과 자긍심을 고취시켜주었다. 그리고 유명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메이저리그를 동경하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나도 커서 메이저리그 현장에서 직접 경기를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열심히 살아갔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엄마 용돈이나 탔던 우리들도 어언 직장인이 되고, 해외여행 정도는 일정만 맞으면 다녀올 수 있는 위치에 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그토록 염원하던 메이저리그 직관의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나의 친한 친구들과 함께 4인 이서 2018년부터 메이저리그 직관 계획을 짜기 이르렀다.
한 번에 많은 돈을 각출하기엔 부담스러우니 다달이 일정 금액을 계를 통해 여행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미국의 서부 여행은 제법 여유롭게 일정을 빼야 하기 때문에 각자에게 최선의 날짜와 일정을 고려하여 2020년 5월 첫째 주의 날짜로 최종 픽스하기 이르렀다.
주기 적으로 퇴근하고 모여 LA의 맛집을 찾고, 숙소를 정하고, 렌터카를 잡고, 동선을 파악했다. 입국 심사를 원활하게 통과하기 위해 서로 회화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선수를 만나서 싸인 요청 멘트도 연습해 보았다. 미국 여행 계획은 그 어느 여행 계획 때 보다 설레고 행복했다. 아무래도 평생 염원하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는 순간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순간의 날만 기다리며 회사의 노고도 가볍게 이겨낼 수 있었다.
대망의 2020년이 밝았다. 설날에 집안 어르신들과 뉴스를 시청했는데 중국 우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했다고 한다.
"까딱 하다가 우리나라 큰일 나겠는데?"
라고 말하던 삼촌의 말이 기억난다. 우려는 현실이 되고 2월 말부터 3월 초 엄청난 속도로 바이러스가 우리나라에 퍼졌다. 전 세계는 한국인을 자국에 입국 금지를 시켰다.
연 초, 입국 금지령이 내려지자 유럽으로 신혼여행이나 축구 직관을 가는 사람들이 여행을 취소했다. 항공사에서 재빠르게 환불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못했다. 설마 우리가 미국 여행을 못 갈 수가 있을까? 그리고 긴급 모임을 가졌다.
"5월에도 설마 바이러스가 못 잡히겠어?"
실시간으로 스카이스캐너를 조회했다. 우리가 미국으로 여행을 가는 날짜를 보니 예약이 아직 활성화되어있었다.
"거봐, 지금 잠시 일시적인 걸 거야"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행복 회로를 돌리며 쿨하게 헤어졌다. 그러나 코로나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유럽과 미국에 감염자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우린 다시 모였다.
"8월 여름휴가 때로 일정을 바꿀까?"
그때만 하더라고 8월 정도면 바이러스가 잡힐 거라고 확신했다. 사람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생겨버리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이후 미국이 코로나로 인해 메이저리그 개막을 취소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드디어 번쩍 정신이 들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비행기, 숙소, 렌터카, 그랜드캐년 투어, 메이저리그 티켓을 모두 취소했다.
코앞까지 온 버킷리스트를 놓치게 되자 오는 허탈감은 매우 컸다. 그리고 솔직히 메이저리그를 보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아쉬움 보다 이 좋은 시기 좋은 나이 좋은 친구들과 두 번 다시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게 더욱 슬펐다. 한동안 무기력증에 빠져 회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코로나가 너무나도 야속했다.
2020년,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유래 없는 한 해를 보냈다. 나도 인생 일대의 버킷리스트를 포기해야 하는 서러움을 겪었지만,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적지 않게 피해를 입으며 힘든 시기를 보낸 이들이 더욱 많다. 인생에 무엇이 더 중요하고,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한해지 않았나 싶다.
새해엔 버킷리스트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코로나 끝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