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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그리울 겐트

by 파묵칼레

브뤼셀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낮은 평야의 중심부에 자리한 ‘겐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헬데강과 리스강이 서로 만나는 걸 보니 겐트라는 이름이 ‘합류점’을 뜻한다는 말이 깊게 다가왔다. 그 물길을 따라 난 운하는 도시를 북해와 연결해 준다.


지리적 조건이 좋아 교통의 중심지로 방직 산업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부유층들이 생기며 경제적 부요와 자치를 누렸다. 그 결과로 중세 건축물과 문화예술이 발달하여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겐트는 문화 교육중심지로서 볼거리가 많은 관광도시로 부상하였다.


시가지에 들어서니 낮은 채도로 물들여진 건물들로 거리 전체에서 차분함과 잔잔함이 스며 나왔다. 그 분위기 속에 내 마음이 스스로 녹아내렸다. 도심에 운하가 길게 드리워져 있어 겐트의 풍경을 완벽하게 채웠다.

건물 풍경과는 다르게 거리에는 여행객들과 현지인으로 활기가 넘치고 북적거렸다. 운하를 중심으로 겐트의 명물들이 모여있어서 둘러보기가 무척 편했다.


그라벤스틴 성을 시작으로, 장엄한 성 바프 대성당, 하늘을 찌를듯한 벨포트 종탑, 우아한 니콜라스 교회를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코렌 마르크트 광장과 겐트 운하를 따라 도시의 매력 속으로 빠져 보았다.


그라벤스틴 성과 성 바프 대성당

벨기에 겐트 중심에 우뚝 선 그라벤스틴 성, 백작의 성(Castle of the Counts)이라는 이름처럼 중세의 권위와 위엄이 강렬하게 드러났다. 1180년 알자스의 필립 백작이 외부 공격 방어용으로 지었다는 이 성은 유구한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돌벽처럼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18세기에는 법원과 감옥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옛 고문 도구, 무기, 갑옷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자가 여전히 그대로 있고 빈틈없이 돌로 쌓아 올린 튼튼함이 느껴지는 무채색 건물의 위용이 전해진다. 회색빛 성벽위로 삼지창을 들고 있는 포세이돈 석상이 강하게 다가왔다. 마치 바다의 신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성 바프 대성당은 겐트의 상징이자 유럽 미술사에 빛나는 걸작이다. 샤를 5세가 세례를 받은 교회이기도 하다. 성당 안에는 후베르트 반 에이크와 얀 반 에이크 형제가 완성한 겐트 제단화 『신비한 어린양에 대한 경배』를 소장되어 있다. 그 제단화를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렘은 말할 수 없었다.


이 제단화가 명성이 높은 이유는 최초 유화 작품이기도 하지만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이 작품을 소장하려고 약탈과 도난을 일삼았던 비극적 역사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수난의 시간을 견디면서 제단화는 15세기 유럽 미술의 반석이자 세계 보물로 여겨지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성 바프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엄숙한 분위기에 신성한 공기가 감돌았다. 방탄유리 속에 보존된 제단화는 병풍구조로 되어있어 펼쳤을 때 앞면과 닫았을 때 뒷면이 각각 다른 그림으로 구성 되어있다.


그림 앞에 서는 순간 제단화의 엄청난 기운에 압도되었다. 인물 하나하나가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색채의 화려함과 숭엄함에 경건함을 더한 제단화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상단에는 여호와를 중심으로 양쪽에 성모마리아와 세례요한이 있다. 양옆 단에는 합창과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이 있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이브가 있고 하단 중심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있다.

제단화 중앙에 예수님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제단화의 주인공들은 하나님의 어린양 들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 피를 흘린 예수를 상징하는 어린양이 제단의 중앙을 이루며 그림의 주제를 온전히 표현했다.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니 많은 상징을 담고 있었다. 클로버는 삼위일체를 뜻하며 백합의 일곱 잎은 성모마리아의 7가지 슬픔과 기쁨을 나타낸단다.


예수님 머리에 쓴 관에 그려진 보석과 옷자락 장식의 놀라운 입체감 표현에 진짜 보석이 달린 것 같은 디테일에 전율했다. 다 글로 쓰자면 상징과 의미가 한도 끝도 없을 만큼 넘쳐났다.

이 모든 상징은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는 창세기부터 수태고지 요한계시록까지 신약과 구약의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집대성하였다. 신과 인간, 죄와 구원,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크나큰 서사에 감동이 밀려왔다.


성당을 나서며 제단화가 시사하는 의미와 감동을 새기면서 성 바프 성당 앞에 있는 반 아이크형제 동상을 올려 보았다.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들이 남긴 아름답고 신비로운 색감과 신앙의 농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치고 있다.


겐트에서 만난 이 제단화는 내게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선 ‘경험’이었다. 아마 평생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제단화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다른 중요한 작품들의 기억이 희미할 정도이다.


겐트의 하늘 아래에서

플랑드르 화풍(벨기에 플랑드르에서 유행한 화파)의 기초를 닦은 아이크 형제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인류 미술사에 길이길이 남을 보물이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보물들은 겐트의 영혼을 반영하는 빛이다.


겐트의 푸르른 하늘 아래 도시의 과거를 보여주는 스카이라인 벨포트는 벨기에에서 가장 높은 종탑으로 여행자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탑은 비상시에 군대를 소집하는 중세의 방어기지로 사용하였다. 또한 중요한 문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창고로도 쓰였고 도시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내부에는 54개의 종과 오르골이 남아 있어 도심을 울리고 있다.


고고하게 서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는 겐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랜드마크이다. 고딕양식의 독특한 회색빛 외벽이 인상적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 위에 바로크 양식의 그림의 화려함과 세련미를 더한 미감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건축물이다.


한때 벨포트가 건립되기 전 망루로 사용되었다. 다양한 시대의 고해성사실을 갖추고 있는 이곳은 신앙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성스러운 교회이다.


겐트 구시가지의 중심이자 번화가인 코렌마르크트 광장으로 가니 분위가 확 달라진다. 펍이 즐비하고 젊음이 절절하다, 긴 파마머리의 젊은 청년이 기타를 튕기며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젊음을 녹이는 청춘 그대로였다. 문득 스친다. 뭐든 한 때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잡고 먹고 즐기고 나눠야 한다.


여행의 쉼표, 겐트의 오후

타이틀이 예쁜 꼬꼬(POULETTE) 펍으로 갔다, 야외테이블에 사람들로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로 행복한 시끌시끌함이 가득했다. 가족끼리 나온 현지인들도 있고 여행객이 대부분이었다.


잘생긴 벨기에 청년이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해 주고 메뉴판을 놓고 갔다. 딸아이는 시원한 필스너 맥주를, 나는 환타 음료를 주문했다.


여행하면서 ‘쉼’은 여행의 묘미를 더해주고 여행의 가치를 부여하는 마법 같은 시간이다. 마음이 풀리고 여유로움이 찾아든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 틈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보며 들떠있는 나를 발견한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그라피티 거리가 나왔다. 좁은 골목 벽면에 가득 스프레이로 그린 그림들이 화려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 벽면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채워가고 있다. 이곳은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쓸 수 있는 자유의 거리였다.


겐트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운하 쪽으로 걸어갔다. 코렌마르크트 광장에서 그라슬레이 성 쪽으로 내려갔다. 유럽에서 손꼽을 만한 유서 깊은 곳답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강둑에 앉아 있는 여행객들의 표정.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평온한 얼굴들이었다. 나는 물을 무서워하였지만, 그날만큼은 운하 옆에 앉아 사진도 찍고 여유를 부렸다. 용기를 만드는 것도 여행이다.


성 미카엘다리 위에 올라갔다. 바로 아치형 석교 위는 겐트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명소였다. 성 미카엘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레이어강이 다리 밑으로 흐른다. 강을 따라 중세풍의 역사적 건축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독특한 카페테라스가 늘어서 문화 관광의 메카가 되었다. 마치 거대한 건축 박물관 같았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길드 건물이기에 더 유명하고 겐트의 유산이 되어 도시 전체를 빛내고 있었다. 사방으로 둘러보고 또 보아도 비현실적인 풍광에 지루할 틈이 없다.


겐트는 지금도 부자들의 문화예술 나눔으로 훌륭한 작품들이 탄생하고 그 예술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교교히 흐르는 레이어 강에 비친 노을빛, 별처럼 빛나는 제단화, 무채색 건물들과 어우러진 완벽한 풍경은 마법이었다. 새로운 곳이 주는 감흥과 추억을 가슴에 담았다.


언젠가 다시 겐트에 오면 그때 추억을 떠올리며 이곳의 강렬했던 첫 느낌을 꺼내어 그때의 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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