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자그마한 학교로 부임하였다. 해맑고 순수함 그 자체의 하얀 도화지 같은 22명의 아이들, 그 아이들을 맞이하는 순간 이미 내 마음은 빠져들었다. 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쓰임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새벽 5시 반에 집에서 출발하여 학교에 도착하면 9시였다. 창가에 얼굴만 내민 초롱이 별들이 나를 기다리며 재잘거리고 있다. 교문까지 마중 나오는 아이도 있었다. 그 먼 길을 다녀도 발걸음은 언제나 하늘을 나를 듯 가벼웠다.
나를 잘 따르는 12살짜리 아이들은 무엇이든 관심 갖고 흥미로워한다. 나는 아이들의 생일에 일일이 파티를 열어주었다. 생일 선물로 필통을 주었더니 하루 종일 손에 땀이 나도록 들고 다니며 행복해한다.
어린이날에는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다. 퇴근하여 집에 오면 늦은 밤이지만 꼬박 밤을 새워 가며 하나하나 카드를 만들었다. 선물 꾸러미를 만들어 쇼핑백에 담아놓으니 새벽 5시, 출근 시간이었다. 그래도 나는 피곤한 줄 모르고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로 향했다.
소풍날에는 버스를 대절해서 현충사에 갔다. 늘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소풍을 다녔던 아이들이었다. 현충사의 역사 체험도 의미를 두고 그토록 즐거워할 줄 몰랐다. 지금 같았으면 롯데월드라도 가서 신나게 놀았을 텐데…
야영도 해보고 싶다 하여 계획을 세워 1박 2일 학교에서 야영을 하기로 하였다. 그야말로 큰 사건이 있었다.
캠프하던 날 저녁에 경운기, 리어카 등 여러 대가 학교 정문으로 들어왔다. 학부모들께서 아이들 저녁식사 준비로 돼지 한 마리 잡고, 한 수레에는 여러 개의 곤로, 또 다른 수레에는 각종 채소, 과일 등 먹거리를 가득가득 싣고 왔다. 잔치도 이런 큰 잔치는 없었다.
아이들과 음악에 맞춰 춤도 추고 캠프파이어도 하니 마냥 신기해하며 밤새도록 하자던 아이들. 학부모들도 한 잔씩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추고 노래도 불렀다.
아이들은 부모님들의 즐거운 모습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냥 즐거워하였다. 깜깜한 밤하늘의 보름달이 환하게 비춰주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여름이면 거의 야외 수업활동을 하였다. 가까이에 큰 개울도 있고 산이 있어서 야외활동 하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수영복 하나 없던 우리 아이들이지만 가재도 잡고 물고기도 잡고 물속에서 뒹굴었다. 옷이 젖으면 젖은 대로 입고 말려가면서 놀았다.
배가 고프면 오디를 따먹고 보라색으로 물든 입으로 재미있다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가을 운동회가 돌아오면 나는 바빠진다. 여름방학기간에 서울 ‘파조’나 ‘은파’에서 주최하는 무용 연수에 참여한다. 열심히 배워 현대와 고전을 넘나들며 매스게임, 부채춤 등을 연습시켜야 했다.
저녁시간까지 해도 투덜거리지 않고 열심히 하던 녀석들, 아이스크림 하나면 밤새워서도 할 기세였다.
운동회 날 부채춤 의상을 단체로 맞출 형편이 안 되었다. 할머니, 엄마, 동네 아주머니들 한복을 빌려 입고 등장하는 모습이 좀 어색하였지만 그 어색함이, 순수함이 난 참 보기 좋았다.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조사했다. 군부대 위문을 가보고 싶다는 의견이 제일 많아 추진을 했다. 몇 번 브레이크가 걸려서 못하였다. 윗분들이 안 된다고 반대를 했다.
나는 젊은 혈기에‘그래 안 되는 건 없잖아’하면서 일요일 새벽같이 학교로 와서 아이들 22명을 만나 타고 들어온 시내버스에 태우고 군부대로 향하였다. 머나먼 길이지만 그 당시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고 즐거워하면 다 해주고 싶었다. 3시간에 걸쳐 군부대에 도착하였다. 우리 아이들을 기다리던 병사들과 장교 그리고 대대장께서 기쁘게 맞이했다.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군부대에서 제공한 식사도 하면서 뿌듯해하던 아이들.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며 신기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세상에 비밀은 없다. 위문 갔다 온 지 여러 달 지나서 일이 일어났다. 누가 급히 교무실에서 나를 찾는다 하여 가니 그 대대장이 앉아있었다. 지나가던 길에 들렸단다. 너무 반가웠지만 교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차를 대접하고 대대장이 간 후 교장과 긴 이야기가 오고 갔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했다.
시골학교는 겨울 준비도 만만치 않다. 그 몫도 고스란히 아이들이 해내야 한다. 이 아이들은 해낼 능력이 넘친다.
특활 시간을 이용하거나 방과 후에 마대자루를 들고 산으로 갔다. 겨울 난로 쏘시개로 솔방울을 주웠다. 산을 뛰어다니면서 신나게 줍는 모습은 그저 예쁘기만 하였다. 그렇게 주워온 수십여 자루나 되는 솔방울로 전교생 6개 학급의 교실을 겨우내 따뜻하게 지폈다.
더 많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교사였던 나는 의욕과 열정만으로 많은 일을 치렀다. 학부모들의 관심과 정성, 동료들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로 철이 들어갔다.
지금 이 제자들이 지천명을 넘었다. 가끔 이 제자들이 나를 불러 식사를 하며 그 시절을 추억한다. 이런 낯선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나에게 고맙다고 할 때 더없이 행복하다. 내가 선생 하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의 대소사, 힘든 일, 궂은일을 모두 해냈던 이 아이들을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사랑한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제자들에게 작은 힘이 되어준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