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만 접한 폼페이를 마주할 생각에 이토록 설렌 적은 없다.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했던 폼페이는 베수비오산의 재앙적 폭발로 영원의 시간 속으로 삼켜진 도시가 되었다.
화산 쇄설류인 용암, 암석 파편, 화산재, 유독가스 등이 시속 100km가 훨씬 넘는 속도로 무섭게 덮쳐왔고 700도가 넘는 열기로 폼페이를 일순간에 휩쓸어 잿더미로 봉하였다. 찬란한 도시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통째로 사라졌다.
베수비오산에서 10km쯤 위치에 있는 폼페이는 화산과 지진 활동이 자주 일어나 지역 특성상 항상 불안 속에 살았다. 유비무환 대책으로 도시의 건물들을 튼튼하게 구축하였다. 폼페이가 가장 발전했을 때 잿더미가 되어 그때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화산 잿더미에 묻힌 시민과 유적의 양이 방대하여 그대로 방치하다가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이 통일되면서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해 절반 이상이 발굴되었단다.
고대 로마 시대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잿더미에 묻힌 유적은 고대 로마문화 고고학적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 괄목할 만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 주도하에 폼페이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폼페이로 들어가는 포르타 마리나는 ‘해변의 문’이라는 뜻이다. 통로가 두 개 있는데 큰 통로는 마차가, 작은 통로는 사람들이 다녔다. 마차가 다닐 수 있게 도로 폭이 마차 폭과 맞추어져 있다. 큰 통로 어귀에는 마차와 짐차의 크기를 제한하는 돌이 박혀있다.
포럼 광장은 폼페이의 심장부 역할을 한 도시 생활의 요지로 중요한 공공시설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로마 시대 법정이었던 바실리카 건물과 가장 오래된 아폴로 신전, 주피터 신전, 공중목욕탕 등의 무너진 건물들의 자취가 그 시절의 영예를 조용히 말해 주고 있다.
화산폭발로 희생된 사람들의 석고 캐스트를 보니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소름이 돋고 숙연해졌다.
사람과 동물들이 화산이 폭발할 때 섭씨 7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 질식하고 화산재에 덮여 시간이 많이 흘렀다.
화산재와 마그마가 덮쳐 사람들과 동물들을 감싼 형태로 유지한 채 서서히 내부는 타서 없어지고 텅 빈 몰드 상태가 되었다.
그 몰드에 자연적으로 새로운 물질이 채워지거나 화산재 밑에 쌓여있는 지층에 공간이 비어있는 것이 있기도 했다. 빈 곳에 석고를 부어 사람의 형상이 출토되었다. 이것을 캐스트라 한다.
그 캐스트가 있는 그대로 그려낸 참혹한 재앙에 가슴이 에인다.
한 가족이 손을 꼭 잡은 생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 사랑하는 연인들의 애틋한 모습,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엎드려있는 임산부의 형상속에 죽음 당시의 절실함이 담겨있다.
건물의 흔적을 알려주는 부서진 돌기둥과 무너진 돌담 사이에서 파릇하게 삐져나오는 생명체가 오늘따라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화산재로 덮인 이 넓은 땅에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다. 폐허에서 헤치고 나온 유적들만 그날의 비극을 대변할 뿐이다.
2000년 전 로마제국 도시 위에서 로마 시대의 전성기 모습을 들여다본다. 폼페이 길은 돌로 다져진 인공적이지 않은 도로이다. 걷기에 불편함이 없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갔을 도로와 건물들에서 당시의 생활이 전해진다.
아치형 건물들이 유난히 많았다. 화산이 폭발한 후 지금도 그 형체가 있는 것을 보면 아치형 건물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보여준다.
야광석을 도로에 심어 밤길을 밝혀줄 가로등으로 썼다니 지혜로움에 찬탄이 절로 나왔다.
공중목욕탕은 미학적이며 과학적인 건축물이다. 내부는 벽화와 조각돌로 장식되어 있다. 벽은 대리석으로 호화롭게, 바닥은 모자이크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시설로 신분적인 차별은 없었단다.
둥근 돔 천장은 유리로 창문을 내어 햇빛이 들어오도록 자연 채광을 하였다. 천장과 벽면에 겹겹의 결을 내어 수증기 방울이 흘러내리게 하여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일은 없다.
통기창을 통해 수증기는 나가고 빛은 많이 들어오게 하였다. 목욕탕에서도 로마인들의 탁월한 도시설계의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놀라웠다.
벽화와 미술품들도 많이 출토되었다. 여관과 마구간, 대극장, 술집, 음식점 등을 미루어볼 때 사람들로 북적대는 도시임이 틀림없다. 벽화에 그 당시의 환경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아폴론과 주피터 등 예배를 드리던 제단은 그들의 종교를 향한 애정과 열정을 보여준다. 경건한 믿음은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경외와 엄숙함속에 발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폼페이에서 로마 시대의 저택, 잘 포장된 도로, 상수도시설, 상점 등 옛 모습을 보았다. 베티의 집, 외벽에 비너스 그림이 있는 비너스의 집, 고급스러운 파우누스의 집 등 여러 개의 집을 둘러보며 화려하게 그려진 벽화, 바닥, 기둥 등에서 2000년 전을 넘나들며 폼페이를 탐색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민들을 위한 공공 기반 시설이 도시정책에 반영된 발전 모습도 보았다. 또한 시민을 위한 공공시설이 많음을 보고 성숙한 도시의 면모에 놀랐다. 폼페이는 유적을 넘어 로마의 사회, 종교, 경제, 정치 생활 기록의 보고로서 가슴 아픈 고고학을 심도 있게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다. 2000년 전 평화롭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두꺼운 화산재에 덮여 사라졌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폼페이 사람들을 생각하며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묵상했다.
2000년 전에 문화에도 놀랐지만 2000년 시간이 고스란히 유적처럼 남아 고대문화의 위엄을 드러냄에 경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