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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를럼, ‘프란스 할스’와 함께한 시간

by 파묵칼레

하를럼은 암스테르담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소도시로 중세의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도심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프란스 할스의 명성으로 알려진 하를럼은 ‘회화의 도시’ ⸱ ‘화가들의 도시’라 할 만큼 유명한 화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네덜란드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은 프란스 할스이다.


그는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평생 대부분을 하를럼에서 보냈다. 렘브란트, 페르메이르와 함께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끈 3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17세기 초에 하를럼은 미술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활동한 할스는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와 혁신적 화풍으로 초상화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작품의 붓 터치가 투박하다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100년이 지나서야 고흐와 마네가 할스를 현대회화의 선구자로 추대하면서 그의 작품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웃음의 화가’라는 프란스 할스, 이름만 알고 찾아간 미술관 앞, 나는 백과사전 지식이 아닌 할스의 숨결과 그 시대의 흔적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였다.


네덜란드식 전통 건물이 양쪽으로 즐비하게 들어선 좁은 골목길에 임팩트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다. 바로 프란스 할스 미술관이다. 뮤지엄 포스터가 펄럭이며 우리를 맞이한다.


오전 11시에 오픈이어서 개관 시간을 기다리며 미술관 앞 거리를 거닐었다. 골목 여기저기에 스며있을 할스의 흔적을 쫓았다.


시간이 되어 입구로 들어가 우측 전시실로 들어섰다. 전시실은 주제별로 나뉘어져 있고 방마다 초상화, 성경 이야기, 집단 초상화 등 다양한 테마로 펼쳐져 있었다.


할스 작품뿐 아니라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도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방은 초상화 전시실이었다. 할스는 1명 또는 2명 초상화는 물론 집단 초상화에서 특히 독창적이고도 독특한 화풍으로 그의 명성을 쌓았다.


할스의 대표적 걸작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감격스러웠다.


그는 주로 부유한 시민, 저명한 학자, 민병대 장교들과 병원 종교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들의 활기 넘치는 생동감이 캔버스 위에 살아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도시 경비대와 시민 민병대 등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화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그 시대적 흐름을 화폭에 생생하게 담아낸 화가였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초상화에는 그의 인정이 녹아있어 인상적이었다.


《유쾌한 술꾼》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터치는 거칠고 투박하다. 술꾼의 발그레 한 볼, 눈자위가 풀린 모습과 다듬지 않은 수염에서 전율이 일었다.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술꾼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함을 읽을 수 있다니 놀라웠다.

살아있는 표정과 밝은 모습의 손짓에, 더 놀라운 것은 술꾼의 기분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부분이 감탄을 자아냈다.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성 아드리안 시민군의 장교들》 작품은 16세기 스페인과 긴 세월 독립 전쟁 시 마을에서 조직된 신민 민병대를 배경으로 한다.


전쟁 후인 17세기에도 민병대원들은 마을의 안전을 위해 일하였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인물들 하나하나의 시선과 구성이 다양하고, 등장인물 개성의 두드러진 묘사에 감복하였다.


인물들의 표정에서 힘이 넘쳐남을 읽을 수 있고. 대원들이 사방으로 들고 있는 창들은 다이나믹한 장면을 연출한다. 서로 다른 포즈나 손짓 등은 사회적 지위를 암묵적으로 알려준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색조가 잘 나타나 있다. 오래 머무르면서 보고 또 보아도 신기한 작품이었다.

《민간 총기부대 장교와 부하들의 미팅》 작품에서는 계급이 높은 장교들은 화려한 검이나 깃발을 갖고 있으며, 부하들은 좀 소박한 차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물들의 표정, 몸짓, 시선이 모두 다르게 처리되어 장면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 자연스러움과 사실감의 연출에 소름이 돋을 만큼 놀라웠다.


할스가 왕성한 활동을 할 때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와 권력을 쥔 네덜란드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면서, 경비대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그런 단체들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단체초상화 그림을 많이 의뢰되었다. 이 작품도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하를럼 양로원의 여성 이사들》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한동안 멈추었다. 흰 레이스 칼라를 단 검정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림의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들에서 흐르는 정적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 작품은 할스가 고령에, 나라의 보조금에 의지하며 힘겹게 살던 때에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붓끝에는 예전의 유쾌함보다 삶의 고뇌가 더 짙게 깔려 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


17세기의 경제 호황이 빛을 잃고, 네덜란드의 경제가 서서히 저물던 시절이었다. 세상은 암울해졌고, 할스의 화풍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밝은 색채의 낙천적인 그림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자취를 감춘 할스도 렘브란트처럼 인생 막바지에 빈곤에 허덕였다.


녹록지 않은 세월이 스며든 듯, 그의 말년 작품 속 인물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앉아 있었다. 그 표정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가로서 마지막 자존심이 깃들어 있다. 할스 자신의 내면이, 감정의 깊은 골이, 그림 속 여성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듯했다.


할스의 인생과 작품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관람한 후, 다른 기획 전시 작품도 보았다. 다양한 시대별 작품들이 한데 모인 전시장은 나에게 특별한 사색의 시간을 주었다.


천천히 한 바퀴 빙 돌아 관람하고 나오니, 뮤지엄 한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정원과 만난다.


정원 벤치에 앉아 있자니 초상화의 거장 할스의 걸작 속에 한 사람으로 내가 있는 듯하였다.


하를럼 전통미를 맛볼 수 있는 골목길을 걸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으로 도시가 잔잔히 살아 움직였다.

갑자기 구름이 짙게 내려앉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행 중에 만나는 비는 언제나 낭만을 더해준다. 차가운 빗방울의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따듯한 차 한 잔이 간절했다.

시장기도 돌고 하여 서둘러 카페에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잔과 네덜란드식 샌드위치의 사이즈가 놀라울 만큼 큼직했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양은 두 명이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커피 향과 어우러진 그 맛은 여행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하였다.


프란스 할스의 그림에 묘사된 인물들이 그렇듯, 하를럼 사람들의 순간을 잡고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속에서 나는 에너지를 얻고 하를럼에서 시간의 숨결을 가슴에 품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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