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산이 바라보이는 노적 마을의 겨울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기 그지없다.
눈 덮인 산과 들판에 떨어져 있는 나락을 찾아오는 참새 떼가 가끔 고요를 깨뜨리고 간다. 아직도 그 적막감이 감도는 고향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 겨울밤도 깜깜하다 못해 칠흑같이 어두웠다. 거리에는 도시 조명은커녕 가로등도 찾아볼 수 없는 시절이었다. 마을 곳곳 가정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전부이다.
멀리 교회당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 집 대문 위에만 커다란 별 모양 성탄 등을 달았다. 집주변이 훤했다. 아버지께서는 해마다 별 등을 달아 나의 유년 크리스마스를 설레게 했다.
우리 집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방송국과 외국인 선교사 사택이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주택이 8채 있었다. 지붕 위로 내민 굴뚝이 있고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은 이국적이었다.
방송국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나의 유년은 빛이 났다. 방송국장 부인이 자기 집에서 선교사 자녀들과 방송국 관련 일을 하는 한국 사람들의 자녀들을 위해 유치원 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국장 부인이 원장이고 교사는 한국인 여선교사여서 마음이 놓였다. 선생님은 예쁘고 단정한 분이다. 외국 아이들 4명, 한국 아이들 4명으로 구성되었다.
매일 아침 나는 손수건이 담긴 빨간색 작은 가죽 가방을 메고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인사가 지금도 기억난다. ‘굿모닝, 굿모닝’ 노래하며 손뼉을 치면서 친구들 앞으로 갔다. 모두 등원하면 원가를 불렀다. ‘에덴 유치원 에덴 유치원 착하고 귀여운 우리들의 꽃동산~~’ 뒷부분이 좀 생각난다. 영어로도 불렀지만,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처음엔 글로벌한 분위기가 어색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재미있고 즐거웠다. 나무블록을 쌓는 놀이도 하고 퍼즐도 맞추기도 하였다. 컬러링 북으로 색칠도 하며 즐거웠다. 언어의 장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간식 시간마다 국장 부인은 손수 만든 쿠키와 케이크를 내주셨다.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었고. 미모뿐 아니라 다방면에 솜씨가 뛰어난 분이었다.
놀이 시간에 밖으로 나가서 잔디밭에 뒹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였다. 방송국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놀이 기구를 탔다. 지금은 어지간한 놀이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시절에 회전무대 같은 놀이 기구를 접했던 것도 행운이다.
친구 중에 ‘쟌 마크’는 자주 우리 집에 와서 함께 놀았다. 마당 한구석 모래밭에서 흙 놀이를 많이 했다.
밥을 먹다가 어쩌다 김치 한 조각을 먹으면 매워서 혀를 내밀고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미국 아이들은 옷이 더럽혀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털퍼덕 땅에 주저앉아 자유로이 편한 자세로 논다. 심지어 더러운 손으로 코도 파고 눕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이 옳음을 알았다. 삶을 더 많이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깔끔떨고 하찮은 것에 얽매여 중요한 것이 묻혀서 놓치고 사는 것이 많다.
미국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는 좀 특별하다. 대형 트리를 만들고 집 안팎으로 멋지게 장식한다.
그렇게 장대하고 반짝이는 트리는 본 적이 없다. 나의 어린 눈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였다. 귀여운 지팡이 사탕, 금별과 은별, 산타클로스 장식과 리스로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도 교회를 다니시고 방송국에서 선교사들과 자주 교류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의 크리스마스 준비에도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가 스며 들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가신다. 한껏 들떠서 마당 끝에 서서 신작로 쪽으로 목을 빼고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다.
새벽에 오는 성가대에게 줄 선물과 예쁘게 포장한 꾸러미가 자전거 뒤에 실려있다. 이런 날이면 나는 괜스레 신이 나서 걸레를 꾹 짜서 책상도 닦고 마당도 쓸곤 했다.
성가대 언니 오빠들을 보려고 잠을 설쳤다. 드디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이 들려왔다.
재빨리 일어나서 아버지를 뒤따라 나갔다. 노래가 끝나고 추운 겨울밤 덕담과 함께 사탕 선물을 받고 기뻐하던 성가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침에 내 머리맡에 어김없이 선물이 담긴 빨간 양말 주머니가 놓여 있다. 이런 기쁨과 추억을 안겨준 아버지가 오늘 부쩍 그립다.
크리스마스 날 유치원에서 열린 성대한 파티도 잊을 수 없다. 휘황찬란한 무대가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인 친구 부모들은 양복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참여했다. 우리 부모님도 양복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셨다.
무용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역할극도 하였다. 무용은 남녀 한 쌍으로 짝지어서 했다. 쟌 마크가 나의 파트너였다.
무용복에 어울리지 않는 긴 내복 바지를 입고 가서 접어 올리고 했다. 그 시절 내복은 천이 얼마나 두껍던지 접어 올리느라 애를 먹었던 잊지 못할 기억도 있다.
산타클로스가 준 빨간 줄무늬가 들어간 긴 지팡이 막대사탕이 인상적이었고 구슬 다이아몬드게임은 그 시절 가장 소중한 선물 중 하나였다. 이 게임판은 대를 물려서 우리 아이들까지 갖고 놀았던 진귀한 것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먹은 미니 컵라면이 지금도 생각난다.
아직도 노적 마을에는 퇴색되어 버린 방송국 자리에 내 유년 시절의 조각들이 유적처럼 있다.
겨울 볕이 내려앉은 유치원 건물에 스며있던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내가 뛰놀던 마당에는 이제 나무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 위로 사랑으로 점철된 기억들이 겹겹이 떠오른다.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그런 기억은 내 삶의 진정한 재산이다. 돌아보면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시시때때로 삶을 반추하며 근면하게 생활하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재촉하기보다는 기다림으로 봐주던 손길이 그립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그리고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유년을 풍요롭게 해주신 아버지이다.
나이가 들면 그런 설렘도 사라질 줄 알았지만, 12월이 오면 포근한 설렘이 인다.
유년을 비춘 성탄 등 불빛은 여전히 따스한 그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