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우데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6시간이 넘는 여정 끝에 도착한 곳, 이르쿠츠크.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초원과 자작나무 숲을 지나니 바이칼 호수의 푸른 물줄기가 안가라강으로 흘러 도시를 감싸고 있다.
오래전부터 시베리아의 관문 역할을 해온 이르쿠츠크는 이름만큼이나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거리마다 세월의 흔적을 지닌 목조건물들이 즐비하다.
정교하게 손질된 벽과 창문의 장식들, 바람결에 스치는 오래된 나무의 냄새는 묘한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고요함이 흐르는 세련미를 갖춘 이르쿠츠크를 ‘동시베리아의 파리’라 부른다. 걸음을 멈추고 도시의 아름다운 숨결을 음미한다.
바이칼 호수
이르쿠츠크 남쪽으로 향하자 드넓은 평원을 넘어 거대한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부랴티야 공화국과 이르쿠츠크 사이에 있는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깊고 담수량이 많은 호수이다.
거대한 규모와 깨끗함 때문에 ‘시베리아의 진주’ 또는 ‘푸른 눈’이라 불린다.
물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여 수심 40m까지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세상의 수많은 강, 하천이 이곳으로 흘러드는데, 오직 안가라강만 바이칼에서 흘러 나가 이르쿠츠크를 지나간다.
바이칼 호수의 수량은 인류가 40년을 마실 수 있다니, 그 깊이와 순수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호수 위에는 27개의 섬이 물방울처럼 떠 있다. 그중 가장 큰 알혼섬에는 유일하게 부랴트족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약 천오백 명 남짓한 주민들은 사냥과 낚시로 생계를 이어간다. 지금은 알혼섬이 널리 알려져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여행객을 맞이한다.
섬 곳곳에는 샤먼 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바람에 휘날리는 천 조각이 이곳 사람들의 소망을 대신한다.
점심으로 맛본 ‘오물’이라는 생선은 바이칼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었다.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맑은 바이칼 호수의 물맛을 닮았다.
바이칼 박물관에서는 바이칼 호수의 방대한 생태와 자연환경,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2천5백만 년이라는 시간을 품은 호수에는 오로지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지구상에 있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로 기대며 살아가고 있다.
그 경이로움 앞에 서자 절로 숙연해지고 그 위대함 앞에서 한없이 작은 인간의 존재를 성찰한다. 세상을 비추는 맑고 거대한 거울 위로 잔물결이 일렁인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이르쿠츠크주는 시베리아의 중심지이자 경제 문화의 요충지이다. 그러나 한때 죄수들과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이기도 했다.
‘데카브리스트’란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 근대적 혁명으로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며 개혁을 부르짖던 젊은 장교들이다. 12월 혁명의 주역들이다.
혁명은 실패하고 12월 혁명 가담자들은 죽음의 땅인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황제는 부인들에게 ‘남편을 버리고 귀족의 삶으로 돌아가라’라고 제안을 한다.
11명의 부인은 모든 특권을 뒤로하고 형극의 길인 남편을 따라나섰다. 이들의 헌신과 치열한 의지로 황량한 유배지가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렇게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가 되었다. 부인들의 순애보는 지금도 코끝을 찡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데카브리스트들을 기념하기 위해 볼콘스키는 자신이 살던 집을 개조하여 박물관을 만들었다. 볼콘스키의 집은 이르쿠츠크의 인텔리들이 모여서 정치 토론을 하고 시 낭송, 음악회 등을 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파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의 문화를 이곳에 심어주어 이르쿠츠크의 위상을 높인 공간이기도 하다.
박물관에는 볼콘스키 가족과 데카브리스트들이 사용했던 옷, 가구 등 생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 낭송, 러시아 민요를 연주했던 장소에서 위대한 그들의 숭엄함이 느껴졌다.
데카브리스트인 남편을 따라서 유배지로 온 부인 중에 특히 볼콘스키 부인 마리아가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숙모이다.
『전쟁과 평화』라는 명작이 바로 볼콘스키와 마리아, 러시아 젊은 귀족이었던 데카브리스들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 있는 회색 목조주택의 박물관은 그들의 숨결을 담고 있어 한층 더 고결하게 다가왔다.
리스트비얀카의 정취
다음 날 평상시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간단히 요기 좀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아침 부드러운 햇발 아래 키 큰 자작나무들이 노랗게 물든 숲길을 걸었다.
이런 아침의 맑은 공기와 고요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일찍 일어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딸지(Taltsy) 민속 박물관은 17세기부터 시베리아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곳이다.
가옥, 학교, 교회 등 목조건물들로 조성된 이곳은 시베리아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풍습을 재현해 놓았다. 러시아인들의 소박했던 일상을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길 끝자락에서 안가라강과 마주한다. 강가에 드리워진 하늘과 물결, 노랗게 물들어 흐드러진 자작나무에 고요함이 스민 가을 수채화가 펼쳐진다.
이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 있을까? 내 안에 묻은 세상사 먼지 덩이가 스르르 씻겨 내렸다.
딸아이와 역마차를 타고 딸지 민속 박물관의 아침 정적을 가르며 달렸다. 인상 좋은 마부는 무척이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토록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질 수 있을까.
아침부터 마부 할아버지의 웃는 모습과 청정한 공기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전통 가옥들은 자작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으로 지어졌다. 나무의 보온력이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에 제격이란다.
빗물에 못이 녹슬어 목재를 썩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의 홈을 파서 서로 맞물리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추위를 막기 위해 창문과 문을 작게 만들고 나무 덧문까지 달았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돋보이고 겨울을 견뎌내기 위한 그들의 흔적이었다.
정착 러시아인들의 노래가 정겹게 들려온다. 낯선 언어이지만 따스함이 스며있다.
당시의 학교 수업 장면과 교실, 교사들 방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옛 시절이 떠올라 한참을 머물렀다.
바이칼 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체르스키 전망대를,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자작나무 단풍이 황금물결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주체할 수 없는 노란색 물결이 주는 위로는 깊었다. 멀리 짙푸른 바이칼 호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안가라강과 이어지는 길에 자작나무가 지천으로 뻗어 숲을 이루었다. 수풀 나뭇가지에 매어진 소망 리본은 우리네 정서와 똑 닮았다.
바이칼 호수의 까마득한 끝을 바라보노라니 나를 얽어매던 시시콜콜한 것들이 바이칼 호수 위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래, 시시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호수가 또 다른 충만함으로 나를 일깨운다.
여행은 늘 나에게 에너지를 주어 다시 일으켜 세운다.
돌아오는 길에 차가버섯을 샀다. 시베리아 차가버섯은 자작나무의 수액에서 영양을 공급받아 자란다.
추운 지방의 자작나무에 기생하는 차가버섯이 약리작용이 유명하여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였다.
서서히 바이칼에도 해가 지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오묘한 색채로 호수를 물들이고 있다. 느슨히 노을이 비끼는 바이칼의 황홀한 황혼 속에 문득 내 인생의 황혼이 오버랩되었다.
자작나무가 노오란 물감을 흩뿌리는 가을날, 마음 시릴 때 꺼내볼 귀한 보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