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함께 걸어온 시간의 선물

by 파묵칼레


어쩜 우리는 낯선 곳의 공기와 색깔에 나를 던져놓고 조금 덜 흔들리기를 바라며 긴 여정에 오를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은 새로움을 얻기 위한 설렘보다는 나를 헤아려 보고 함께 오랜 세월 살아온 낭군의 숨결을 다시 느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뉴질랜드 남섬으로 향했다.


크라이스처치 남쪽으로 향하자 캔터베리 대평원이 끝을 가늠할 수 없이 잔잔히 이어져 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넓은 평원이라는 말이 굳이 필요 없을 만큼 피부에 와 닿았다.


시야에 가득 담긴 대평원을 지나 마주한 테카포 호수는 해발 700m 매켄지 분지에 자리한 빙하 호수로 푸카키 호수와 물길로 이어져 있다. 만고의 시간을 거쳐 얼음이 깎아 만든 분지 한가운데 호수는 말없이 누워있었다.


‘테카포’라는 이름은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작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밤하늘의 별들이 숨을 고르며 쉬어 가는 곳이라 할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호수는 삶을 재촉하는 법이 없다. 한가함과 여유를 주는 호숫가에서 오래 서성거렸다. 긴 직장생활에서 차곡차곡 쌓인 찌든 마음의 때와 피로가 씻겨내려 가고 있었다.


은퇴란 인생의 한 단락의 마무리가 아니라 또 다른 숨을 더 깊이 들이마시는 것임을 알았다.


남섬에 살포시 내려앉은 푸카키 호수는 맑고 옥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빙하와 깊게 패인 크레바스를 안고 있었다.


빙하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형성된 호수답게 색감이 더 푸르고 짙었다. 그 짙푸른 푸카키 호수 앞에서는 우리는 묵묵히 자연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풍경과 하나되는 시간이었다.


빙하가 암석을 갈아 만든 빙하 분말 때문에 미세한 입자가 햇빛을 반사해 밀키블루 색을 만들어낸다. 그 밀키블루색이 바로 호수의 그 길고도 느린 역사의 숨결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 촬영지가 된 이유도 알겠다.


마운드 쿡으로 가는 길에 푸카키 호수가 끝 간 데를 모르게 펼쳐졌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오래 잡아 둔 호수는 무거웠던 나의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그저 바라볼 뿐인데 나의 몸시계는 스스로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늘 바쁜 일상에 쫓기던 나의 리듬이 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푸카키 호수 너머로 마운드 쿡이 다가온다. 정식 명칭은 아오라키 마운드 쿡이다.


‘아오라키’는 구름을 뚫는 산이라는 뜻이다. 왜 뉴질랜드의 에베레스트라 불리는지 이해가 간다.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한 산들이 하얀 눈을 덮고 길게 누워있다. 그 위로 시간도 내려앉아 머문 듯했다. 어떻게 묘사해도, 그 어떤 말로도 이 감동을 온전히 전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산봉우리들과 빙하, 만년설원이 광활하게 전개되는 마운드 쿡의 위용 앞에 나는 꼼짝 못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하늘의 신 라키에게는 아오라키를 포함한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바다를 항해하는 중에 이들은 암초를 만나 전복되었고 그들은 모두 카누 위로 올라가 신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살을 에는 바람 속에 차례차례 모두 돌이 되어버렸다.


그 카누가 오늘의 남섬이 되었고 네 형제는 남알프스의 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되뇌며 마운드 쿡을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스토리이지만 내 눈앞에서는 풍경이 되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마운드 쿡을 뒤로 하고 여왕의 도시 퀸스타운으로 이동하였다. 마운드 쿡의 웅혼함의 여운이 다른 빛의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깁스톤 밸리에 들러 에메랄드빛 와카티푸 호수가 지닌 신비로움을 마주했다. 숙성된 와인 한 잔은 여행의 리듬에 한 템포 쉼을 주었다.


와카티푸 가든을 천천히 트레킹하였다. 느린 걸음은 호수의 숨을, 바람의 결을 좀 더 뚜렷이 전해주었다. 이름 모를 이국의 꽃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시간속에서 나다움의 숨소리가 들렸다.


스카이라인 곤돌라를 타고 봅스 피크 정상까지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퀸스타운은 와카티푸 호수 가장자리에 안겨있는 듯했고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산 정상 부근에 쌓인 눈은 운치를 더했다. 여왕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가 설명되었다.


애로우 타운을 들러보았다.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골드러시 시대 광부들이 금을 캐러 와서 정착했던 마을이라 더욱 흥미로웠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떠올라 마을 곳곳에 자연스레 관심이 더 갔다.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여전히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최초 카라와우 번지 센터가 있는 곳, 퀸스타운은 극한의 액티비티 천국이다. 번지점프, 스카이다이빙, 카약 등 수많은 도전이 이곳에서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호수를 품은 고요한 도시에 이렇게 넘치는 에너지가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이 도시와 왠지 잘 어울렸다. 직접 도전은 못 했어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열정을 충분히 느꼈다.


다음 날 남섬의 하이라이트 밀퍼드 사운드로 향했다.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안에 있는 밀퍼드 사운드에서 크루즈에 탑승했다. 선상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바라보는 피오르드 해안은 상상 이상으로 환상적이었다.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마이터 피크, 12000년 전 빙하의 무빙에 의해 만들어진 피오르드의 장엄함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그 바다를, 크루즈를 타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


스털링 폭포는 만년설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루어낸 155M나 되는 장대한 폭포였다. 쉼 없이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며 우리는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함께 있음만으로 충분했다.


뉴질랜드의 파라다이스 밀퍼드 사운드가 선사하는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빙하 호수와 대자연의 풍경은 이제 은퇴한 우리 부부에게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크나큰 선물처럼 다가왔다.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온 나날들, 나의 젊음과 인내, 성장이 담긴 시간이 이곳의 물과 바람, 풍광 속에 오버랩되었다.


37년 고이고이 적힌 나의 챕터가 한장 한장 찬란히 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것이 퇴색되지만 쌓이고 다져진 기억들은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서로의 숨결을 들으며 걷는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은퇴라는 이름의 문턱에서 밀퍼드 사운드는 속삭인다.

‘열심히 참 잘 살아왔다. 이제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걸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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