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횡단 (1)
L은 오래된 친구다. 우리는 대학교 동기인데 정작 학교 생활할 때는 별로 붙어 다니지 않다가 졸업 후에 친해졌다. 그런 친구들이 있다. 억지로 만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이 이어지는 관계. 그 관계의 자연스러움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 애정, 정성과 관심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먼저 안부를 묻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응원을 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 안에서 단단한 신뢰가 형성되면 만남의 횟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늘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카레집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다. 거리가 멀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어느 먼 동네의 작은 카레집. 친구는 몇 년 전부터 그곳의 단골이라 나와 만나면 언제나 그 집 이야기를 꺼내곤 했었다. 네가 맛있다니, 어련히 맛있겠어. 그녀의 맛집 추천은 확실히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 취향과 감성의 결이 비슷한 친구가 소중한 이유다. (맛집 때문에..?)
소담한 4인용 테이블 하나와 5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카운터 앞 좌석이 전부인 작은 카레집에 들어섰다.
벽면에는 단곤손님들이 남기고 간 편지들이 편안하게 붙어있고 묵직해 보이는 월넛 테이블 덕분에 가게 안은 가볍지 않으면서도 따뜻해 보였다. 우리는 카운터 앞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10가지 천연 향신료가 들어갔다는 키마 카레를 주문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는 곳에 라임잎이 들어간 물병 두 개가 귀엽게 서있었다. 사진은 한 장만 찍고 휴대폰은 테이블에 덮어두었다. 우리 사이에 곧 여러 주제들이 떠올랐다. 긍정, 부정, 아름다운 일, 나태했던 시기, 불합리한 일, 그래도 극복한 것, 작은 성취 같은 것에 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이 좋았다.
L과의 대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소중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비슷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편견이나 잣대에 좌지우지되거나 교묘한 비교 따위의 느낌은 들지 않는 시간. 그리고 우리는 그냥 들어준다. 그랬었어? 힘들었겠네, 나쁜 사람들. 함께 미간을 찌푸려줄 뿐이다.
키마카레가 나왔다. 다진 돼지고기와 카피르 라임 잎이 수북이 쌓여있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허브 민트에서 느껴지는 향긋함이 봄에 어울리는 메뉴라고 느껴졌다. 그중 키포인트는 반숙 달걀조림이다. 간장에 적절히 녹아진 탱탱한 달걀조림을 반으로 톡 갈라서 노른자가 흘러나오기 전에 입안으로 쏙. 그리고 나머지 반은 카레와 함께 먹는다.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이 카레집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때가 적어도 4년 전의 일이다. 아니 5년 전이었던가. 네가 분명히 좋아할 맛이라던 친구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하다 할 정도로 건강한 맛을 선호하는 나의 취향은 여전했다. 가끔 이렇게 지독하게 변하지 않는 취향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취향과 특색은 '나 이거 좋아하네'하는 시간의 중첩이 만들어주는 것 같다.
어떤 영화가 내 감성의 폭을 넓혀주는지, 오래도록 좋아하는 음식, 그 식감은 어떤 것인지, 나답게 느껴지는 옷 스타일,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 시간을 보내는 방식 모두 마찬가지다. 어딘가 망가졌을 때 나를 다시 세워주는 일상의 루틴까지도.
자신에게 좋은 것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 유행을 쫓아가지 않아도 속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미디어나 알고리즘이 권위를 부여한 취향은 내게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그 시간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스스로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까다로워진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아무렴 어때.
사실은 일말의 용기가 필요한 순간일 수도 있다. 개인보다는 집단이 중요시되는 분위기에서 대화에 끼지 못할까 봐 혹은 촌스러운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될까 봐.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모두 다르고, 각자가 고유한 개성이 있는 사람들일 텐데 왜 자꾸만 비슷해지려고 하는 걸까.
공기 중 부유하는 것에 자신을 내맡길수록 깊이는 사라지고 생각은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카레집에서 나와 서울의 서쪽을 향해 걷기로 했다. 걷는 걸 좋아하는 두 친구가 만나면 무진장 걷게 되므로 오늘은 보부상 캐릭터를 놓아주고 최대한 가볍게 하고 집을 나섰다. 가방은 가장 작은 걸로, 활동성이 좋은 편한 옷과 운동화, 겉치레를 그만두니 몸과 마음이 한결 산뜻해진 날이었다.
도시횡단은 2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