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퍼펙트 데이즈

by 혜아

저는 장마를 좋아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기엔 왠지 모르게 느긋하게 지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쁘지만은 않다. 입고 나간 옷이 흠뻑 젖어버리거나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축 늘어지는 건 썩 유쾌하지 않지만.

잠시 우천 중단. 그러니까 이 시기는 혼자 멈춰 서있는 게 아니라 다 함께 멈춰서 잠시만 쉬자고 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게으름에 좋은 핑계가 되기도 한다.


유독 비가 오는 장면을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빔 벤더스 감독, 야쿠쇼 코지 주연의 퍼펙트 데이즈.

이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춰 들어오는 모습이지만 정작 돌려보고 싶은 부분은 비가 내리는 장면들이다.


도쿄 한복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자 굵은 빗줄기가 내린다. 그 소리는 도시의 모든 잡음을 시원하게 삼켜버릴 것만 같다. 발목까지 오는 긴 우비를 입은 남자가 비를 맞으며 어딘가 자전거로 내달리고 있다. 곧장 들어간 곳은 지하철 역사 안의 작은 선술집. 우비를 탁탁 털고 자주 앉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자주 앉는 곳이라는 건 관객의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라는 주인장의 말 한마디와 함께 나오는 시원한 하이볼. 그가 매일 같은 곳에서 마시는 그 한잔은 비가 오는 날에도 예외는 없다.


영화관에서 이 장면을 보곤 단숨에 좋아하게 되었다.

드문 일이지만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몇 번이나 보는 경우가 있다. 그걸 이해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느낌을 확실하게 안다.


ⓒ 2025 by hyeah


2020 도쿄 올림픽. 시부야에서는 The Tokyo Toilet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안도 타다오, 쿠마 켄고, 소우 후지모토를 비롯한 세계적인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을 기용하여 도쿄 내 17군데 공중화장실을 새롭게 탄생시킨 프로젝트였다. 이를 기반으로 야나이 코지라는 일본의 프로듀서가 영화를 기획했다. 처음에는 공중화장실을 무대로 한 청소원의 이야기를 단편영화나 사진집으로 만들어보자는 계획이었지만 연출을 수락한 빔 벤더스가 단편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장편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시작이었다.


적막한 아침, 누군가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있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휴대폰 알람을 대신한다. 이불을 정돈하고 어젯밤 자기 전에 읽던 책을 잠시 들춰본다. 곧이어 나무 계단을 타고 단출하고 아담한 부엌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간다. 양치질, 면도, 세수하기, 화분에 물 주기(중요한 단계). 모든 움직임은 물 흐르듯 흘러간다.


일할 때 입는 점프 슈트를 한 번에 입고는 현관문 옆에 있는 동전 몇 개와 집 열쇠를 챙기고 현관문을 나선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 집 앞에 오래된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빼내 들고 오래된 차에 올라탄다. 오늘 들을 노래를 고르는 시간. 음악은 카세트테이프로. 재생 버튼을 누른다. 어딘가로 출발하는 그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The Animals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


ⓒ 2025 by hyeah


도쿄에서 공중화장실 청소 일을 하는 히라야마의 일상은 이렇게 시작되며 영화 극 초반엔 이 과정이 매우 디테일하고 정교하게 다뤄진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별다른 사건 없이 흘러가고 섬세했던 그의 아침 일상에 대한 묘사도 서서히 단순해진다. 거리의 빗자루 소리에 눈이 떠지면 곧바로 양치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던가 현관문을 나서기도 한다. 어느 날은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트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상상할 수 있다. 그의 일상은 처음 묘사되었던 그날의 루틴으로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자세히 보여지지 않아도 충분하다.


어느 장면에선 그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어쩌면 살기 위해 자신에게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최소한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번쩍거리는 세단은 필요 없지만 루 리드의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하루 중엔 태양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찾고 한 장의 사진으로 간직한다. 중요한 건 코모레비다.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 소설집을 사고 인화된 필름을 찾는 주말은 평범하기보다 아름답게까지 비친다. 오랜 시간 우아하게 축적된 그의 취향이 닮고 싶은 삶의 형태가 되어있다. 그건 흔히 말하는 명성이나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이들에게 그 일상은 더 빛이 난다.

완벽한 하루는 흠집하나 없는 시간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에 기쁨을 끌어내는 능력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의 맑은 시간을 섬세하게 체험하며 알 수 있다. 인생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없다고 말이다.


-코모레비는 일본어로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의미한다.

-야쿠쇼 코지는 이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배급사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퍼펙트 데이즈로 76회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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