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시한부 선고
이제 아버지와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 것 같았는데 야속하게도 그 무렵, 아버지의 시한부 선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 언젠가 한 번은 헤어지잖아.
그냥 그게 좀 빨리 온 것뿐이야...
2021년 3월, 코로나 확산이 한창이던 때였다. 직전 여름에 아버지는 위암 초기로 판정받고 절제 수술을 받으셨는데, 6개월이 지나 통증과 이상증상을 발견해 병원 검사를 받으셨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복부 전체에 전이가 되었고 이제 병원치료는 의미가 없으며 통계적으로 남은 시간은 약6개월이라는 시한부 판정. 그 소식을 아버지는 퇴근길 지하철 안의 나에게 전화로 전하셨다. 아버지는 통증을 집에서 버티기 힘들어지면 곧바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 어떤 치료도 받지 않겠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달라고 하셨다. 담담하게 말씀하셨지만 담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족 중 누군가가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느낀 슬픔의 고통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약사였던 나는, 대체요법을 통해 잘하면 1년은 버티실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악화되어서 극심한 통증으로 진단 3주 만에 물조차 마실 수 없게 되었다. 고려하던 대체요법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2년 전 칠순을 맞던 어느 날, 아버지는 연명치료 거부 등록을 해두었다며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오면 절대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 달라고 진지하게 당부하셨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그 흔한 고혈압도 없었고, 근골격계도 불편한 데가 없는 정말 건강한 분이었다. 친할아버지도 건강하셨고 아흔을 넘기셨기에 우리 가족 모두 아버지가 오래 건강하실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위암이 발견되었을 때도 초기였고 초기 위암은 예후가 좋은 편이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항암치료 권유에도 아버지는 “만약 재발하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치료를 거부하셨고 수술 후 다시 텃밭을 가꿀 만큼 금방 회복하셨다. 그랬던 터라 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당시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 같다. 말기 진단 소식을 들은 후로 장례식에 가 있는 꿈이나 임종을 보지 못하고 뒤늦게 병원에 도착해 대성통곡하는 꿈을 밤마다 꾸곤 했다.
하루가 다르게 아버지의 통증은 심해졌고 결국 말기 판정 후 3주가 채 되지 않아 호스피스 병동으로 향했다. 당시엔 마르고 통증이 있을 뿐 겉보기엔 양호한 상태였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기 전날이었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나를 위로하듯 말씀하셨다.
“00야, 우리 언젠가 한 번은 헤어지잖아. 그냥 그게 좀 빨리 온 것뿐이야... 최근 2-3년 동안 너희로 인해 너무너무 행복했어. 아빠는 여한이 없다..”
그날 밤 늘 앉으시던 소파에 앉아계신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추억 하나를 떠올리셨다. 등굣길 늘 지나가던 터널을 통과하면 바다 위로 눈부시게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곤 했는데 그 장면이 떠오른다고. 고등학교 3년 내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는 차로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셨었다. 지금 생각하니 3년을 거르지 않고 데려다주신 것은 보통의 사랑과 정성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 아버지께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나 보다.
다음 날 미련 없이 자신의 두 발로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셨다(일반적으로 이런 상태의 환자를 호스피스 병동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코로나 시기의 특수성과 때마침 비어있던 병실, 아버지의 강력한 의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다니던 약국을 그만두고 간병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혼자서 너무나 힘들어하셨기도 했고 얼마가 될지 모르는 그 시간을 곁에서 지켜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버지와 사이가 매끄럽지 않았던 탓에 더욱 그랬다.
통증 외엔 아버지가 아직은 의식도 선명하고 거동이 불편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름의 기대를 했다. 마치 영화처럼 병실에서 서로의 마음이 누그러져서 그간의 불편한 건 털어내고 좋은 추억을 다정하게 나눌 수 있는 화해의 시간이 펼쳐질 수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다. 죽음의 과정을 너무 몰랐던 데에서 온 오해와 착각.
아버지의 통증과 구역감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시, 예전 사진들, 좋아하실 만한 음악 등등을 챙겨 갔지만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그런 것들을 들춰보기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 통증이 밀려오면 통제하기 위해 한껏 힘을 주면서 참으려 애쓰셨다.
간병을 시작한 첫 2주 동안 아빠에겐 사랑의 충고였지만 오랜 기간 나를 아프게 해 왔던 얘기를 또다시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몸이 힘들어지자 아버지의 성격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나와 어머니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거친 말을 뱉어내기 시작하셨다.
그 간 해온 마음공부와 상담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울면서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돌아가시기 전에 정 떼려고 한다는 옛말이 떠오를 만큼 아버지 곁에 있는 일이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를 지켜야만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마음을 탐색하며 알게 된 것이 조금씩 힘을 발휘했고 임사체험자인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를 통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는 회진 오는 교수님께 왜 내가 아직 살아 있느냐고 내 삶이 언제 끝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마다 담당교수님은 남은 시간 동안 하지 않았던 것을 해보며 잘 보내 보라며 타이르셨다. 어느 아침 회진 후, 내게 그러셨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앞에 총이 있다면 서슴없이 자신의 머리를 쏠 거라고. 꾹 참고 계신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아.....! 가슴이 아파왔다. 아버지는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하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잘못 알았다며 고개를 흔드셨다. 안락사처럼 편안하게 죽게 될 것으로 오해하셨던 것이다. 매체가 조명한 호스피스 병동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현실을 왜곡한 건 아니었지만 죽음의 과정에서 오는 고통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론에 비친 장면은 절반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절반의 무지로 인한 당혹감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씀하는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