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뱉지 못한 마음, 영화 <스왈로우>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강렬한 색의 대조와 치열한 인물 배치로 화면을 채웠다면, 영화 <스왈로우>는 빨강과 파랑, 노랑을 주로 사용했음에도 그 인상이 짙지 않다. 안개가 깔린 것처럼 뿌옇기 때문일 거다. 분명한 색을 불분명하게 비추었듯 헌터의 삶도 베일에 싸였다. 무엇보다도 헌터에게 생긴 '삼키는' 습관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영장이 딸린 널따란 이층 집. 헌터는 수영장 앞에 서서 분주하다. 수영장 위를 떠다니는 낙엽을 뜰채 안에 담고, 한쪽에 털어내고, 다시 뜰채를 움직인다.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는 일. 헌터가 맡은 매일의 업무다. 느긋함도, 지루함도 보이지 않은 몸놀림은 강박에 가깝다. 자신이 정해둔 위치에서 벗어난 몇몇의 낙엽을 화풀이하듯 집어던지기도 한다.
반면 헌터의 남편 리처드는 여유롭다. 회사에서 승진하여 승승장구하는 중이고, 오늘도 헌터가 차려준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나름 성실한 남편 같지만, 가끔 섬뜩하다. 다림질을 실수한 헌터, 리처드는 이 셔츠에 어울리는 다른 타이가 없다며 화풀이한다. 직접적으로 헌터에게 고함을 지르지 않았으니 리처드 자신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헌터를 내려다 보고, 셔츠를 패대기치는 동작과 소리. 그 중압감은 고스란히 헌터에게 흡수된다. 그러나 헌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화를 낼 줄 모르는 것인가?
혼자 집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마음에 안 드는지 선을 마구 휘젓던 헌터를 떠올려 본다. 짧은 한숨에 섞인 짜증. 표출하는 방식의 차이일까. 단순히 그렇게 보기만은 어렵다. 둘은 동등하지 않고, 그 사실을 서로 인지한다. 리처드는 풍족하다. 보호자들은 언제나 그의 편이고, 돈도 많고, 주변에 사람들도 많다. 헌터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사회에서 살아가는지라 각자의 가치가 하나의 잣대로 평가당한다. 얼마나 많은 물질을 가졌고, 지속적으로 그 물질을 창출해낼 수 있느냐. 이 절대적인 기준 아래에서 서로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사람들. 헌터는 리처드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말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헌터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리처드만 헌터를, 자신의 뒤를 이어갈 아이를 가졌을 뿐이다.
헌터의 임신 사실에 리처드는 들뜬다. 자신이 바라던 완벽한 삶에 거의 맞닿았다. 헌터는 아주 불편하고 불안해 보인다. 연푸른 잠옷 차림으로 빨간 소파에 앉은 헌터. 이 붉음은 영화가 보여주는 빨간색 중에서 가장 채도가 높고 선명하다. 헌터는 왜 자신의 임신 사실에 이토록 겁을 먹었을까. 이때를 기점으로 헌터는 홀린 듯이 삼키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집어 든 건 빨간 물결이 치는 투명 구슬. 영화가 시작할 쯤에 잠깐 등장했던 그 구슬이다. 새끼양이 도살되고 살가죽이 벗겨진 얼굴을 비추었다가 구슬이 나왔다. 붉은 선들은 핏덩이, 그러니까 태아를 떠올리게 한다. 구슬을 꿀꺽 삼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헌터. 살짝 머금은 미소는 편안해 보인다.
리처드의 가족과 만난 자리에서도 삼키는 버릇은 이어진다. 둘의 아이를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주인공은 금세 리처드가 독차지한다. 대화에 끼어들 수 없던 헌터는 얼음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우적우적 씹어 삼킨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들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고요한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아니,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리처드는 말했다. 자신은 일상적이지 않은 예외의 것을 좋아한다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너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구슬에서 시작해 송곳, 나사, 또 다른 구슬, 심지어는 건전지까지 삼킨 헌터. 결국 리처드와 그의 가족에게 이 버릇을 들키고 만다. 개인 상담이 시작되고, 헌터는 점차 상담사에게 마음을 연다. 넌지시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고, 오래 묻어둔 비밀을 덤덤히 털어낸다. 자신의 아버지는 강간범이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임신 중단할 수 없었다고. 그렇게 태어난 헌터는 같은 핏줄이지만 핏줄 아닌 존재로 그 주변을 맴돌다가 떠나야만 했다.
때로는 깊이 감추었던 사실을 펼쳐내기만 해도 큰 위로를 얻는다. 헌터도 그러했다. 정원에서 흙을 만지작대다가 홀린 듯이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삼키지 않았다. 변화의 순간은 애석하게도 시작하자마자 끝났다. 리처드가 있던 이층 방에서 헌터는 핸드폰 너머로 상담사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던 결연한 눈빛과 달리 조심스럽게, 헌터의 이야기를 전하는 상담사.
윽박지르는 리처드에게 직접 헌터와 대화해보라는 조언이 통할 리 없었다.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쏟아지는 와중에 헌터는 무력했다. 배신감, 당혹스러움, 공포. 헌터는 하루 종일 자신을 감시하는 간병인 루아이도 받아들였고, 헌터의 버릇을 직장 동료들에게 퍼뜨린 리처드의 무례를 참았다. 리처드는 항상 억울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헌터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힘들다고. 하지만 리처드 가족의 최선은 늘 폭력적이었다.
이어진 충격으로 헌터의 버릇이 다시 드러나자, 리처드 가족은 헌터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자 한다. 설득과 동의의 과정은 생략된, 일방적인 통보였다. 문제의 근본을 살펴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만 삭제하려는 태도. 모두 리처드만을, 자신들의 평온한 삶을 최우선에 둔 탓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타인과 함께 살면서 긍정적인 영향만 얻으려는 마음은 잘못되었다.
간병인 루이라만이 헌터의 속내를 이해한다. 시리아에서 전쟁을 겪다가 온 루이라는 상담사처럼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리처드처럼 행복한 관계를 강조하지도, 리처드의 어머니처럼 신경 써주지도 않는다. 되려 그 거리감이 헌터를 편하게 만들고 접점 하나 없던 둘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헌터가 이불속이 아닌 침대 아래를 피난처로 삼았을 때, 루이라는 똑같이 기어들어와 헌터의 어깨를 다독였다. 괴로움을 겪는 동료를 위로해주는 손짓. '전쟁 통에 있으면 마음의 병이 생길 시간도 없다'라고 말했던 첫 모습과 상반된 태도였다. 루이라는 깨달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전쟁인 세상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가 폭격당하는 조용한 세상도 있다고. 이러한 동질감 때문일까.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루이라는 헌터의 탈출을 돕는다.
혼자가 된 헌터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기묘한 침묵. 어머니는 다정한 말씨로 숨을 곳을 찾는 헌터를 거절한다. 리처드의 손아귀에서 탈출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평생 가지고 다닌 강간범의 사진을 들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헌터의 목적은 분명하다.
나의 탄생이 죄가 아님을,
나는 아무 잘못이 없음을,
나는 당신과 닮지 않은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인정해.
가해자는 헌터의 마음을 눈치채고, 바라는 말을 그대로 들려준다. 진심인지는 모른다. 새로운 가정과 평화를, 지금의 삶을 지키고자 했던 위장일 수도 있다. 허무할 정도로 가해자는 지난날의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타인을 착취하며 우월감을 느꼈던 초라한 몸뚱이를 옥살이를 하며 배웠다고.
피해자의 피해자였던 가해자의 반성과 인정에 응어리가 풀린다. 타인을 미워하는 것도 괴롭지만, 자기 자신을 '리처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깔아뭉개는 일은 더욱 괴로웠을 테다. 헌터는 드디어 평생 살았던 감옥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이 삼키고 싶었던 약을 삼킨다.
가족의 울타리에 영원히 들어서지 못하는 고통, 짐덩이 같은 탄생은 이제 없다. 비로소 몸 안에 있던 모든 죄책감과 악몽을 배설하고, 헌터는 문 밖으로 나선다. 열린 문과 함께 헌터는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들과 섞인다. 헌터는 이제 무엇을 찾아 나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