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단 Feb 28. 2020

벗어날 수 없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장르: 드라마

국가: 프랑스

러닝타임: 121분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여기서 두 여성 간의 사랑보다는 세 여성의 연대, 평등, 저항을 주요 키워드로 삼고 싶다.




#각자의 저항
 화가 마리안느와 귀족 엘로이즈, 하인 소피는 각자의 환경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을 해온, 하고 있는, 할 사람들이다.

•화가 마리안느
 18세기 프랑스, 여성인 화가는 남성에 비해 제약이 많았다. 여성은 남성의 누드화를 그릴 수 없지만 남성은 언제나 그릴 수 있었고, 여성은 시대의 과업이라고 불리는 대주제를 그릴 자격이 없지만 남성은 그 임무를 맡았다. 심지어 여성은 전시회에 출품을 할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며 미술사를 다시 보면, 유명 화가들이 대부분 남성인 것은 당연한 결과다. 여성에게는 일명 '큰 일'을 책임 질 기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귀족 엘로이즈 엘로이즈는 사회와 어머니의 강요에 반反하여 싸워 온 사람이다. 사실 엘로이즈의 언니가 더 오래 싸웠을지도 모른다. 언니는 바뀌지 않는 세상과 그 세상에 편승하는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저항으로 죽음을 택했다. 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면 당신들의 뜻도 이루지 못하도록. 산책을 허락받은 엘로이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언니가 떨어진 절벽을 향해 달리는 것이었다. 죽음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인지, 그 저항을 자신도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까. 세상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을까. 미친 듯이 달리던 엘로이즈는 절벽 끄트머리에서 멈춘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뒤돌아 마리안느를 본다. 어쨌거나 그는 죽음이 아닌 삶을 택했다. 이 맥락에서 포즈를 취하겠다는 말을 다시 보자. 죽음 대신 삶을, 삶에서는 평등을 바라던 엘로이즈. 포즈를 취하겠다고 말한 그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가부장제를 답습하는 어머니가 떠난 5일 동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소피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 중심에는 엘로이즈가 만든 평등이 있다. 하인, 귀족, 화가의 신분이 아닌 세 여성, 세 친구, 세 사람으로 존재한다. 수평인 식탁을 앞에 두고, 왼쪽에서 엘로이즈가 식사를 준비하고, 오른쪽에서 소피가 자수를 두고,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을 오가는 마리안느의 모습은 엘로이즈가 말했던 평등이 그대로 실현되던 순간이다. 그러나 내부의 평등은 외부로 뻗어가지 못한다. 초상화가 완성되고,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깊은 관계는 격정으로 치닫는다. 엘로이즈는 묻는다. 자신이 결혼하지 않기를 바라느냐고. 마리안느는 그렇다고 답한다. 엘로이즈는 다시 묻는다. 그럼 결혼하지 말까? 마리안느의 대답은 '아니.' 어머니가 돌아오면 엘로이즈는 얼굴도 모르는 밀라노 남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 둘 중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모든 일의 원흉인 세상의 관습을 탓하고 부수는 길은 너무 험난해서,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그들은 쉬운 방법을 택했다. 서로를 탓하기. 하지만 이들에게 사랑할 시간은 물론 싸울 시간도 없다. 서로를 향한 분풀이는 닥쳐 올 현실 앞에서 사그라진다.
•소피생리통 때문에 간밤에 고통스러워하던 마리난느. 소피는 마리안느를 위해 씨앗을 불에 데피고, 넌지시 말한다. 생리를 안 한 지 석 달이 되었다고. 그러니까, 임신 한 지 석 달이 되었다고. 아이를 원치 않는 소피는 낙태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무작정 달리기, 약초를 끓여 마시기, 공중에 매달리기.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함께 소피를 도왔다는 점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터무니없어 보이는 방식에도 모두 진지하게 임한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를 격려하고, 약초를 찾고, 어느 누추한 오두막에 가는 길을 동행한다. 오두막 안, 전문의도 존재하지 않는 어둑한 곳에서 낙태 시술이 진행된다. 마리안느는 괴로워하는 소피의 모습에 고개를 돌린다. 자신도 겪어 본 고통이기에 괴로운 탓일까. 그러나 엘로이즈는 똑바로, 두 눈으로 보라고 한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을 것처럼 올곧게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 이렇게나마 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처럼. 괴로워하는 소피의 옆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한두세 살쯤 되었을까. 소피의 손가락을 잡고, 눈물을 닦아주듯이 눈가를 만지고, 옹알이를 한다. 저 아이를 품었던 여성은 원했던 임신이었을까, 원하지 않던 임신이었을까. 바란대로 아이를 낳은 것일까, 어쩔 수 없이 책임을 지어야 했을까. 책임과 고통은 왜 한 성별만 향할까. 만약 소피가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아서 혼자 길러야만 했다면 소피의 인생은, 소피가 낳은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울듯이 웃는 소피의 얼굴은 슬픔과 왠지 모를 안도가 담겼다. 이 복잡한 감정은 신분 관계없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어려움이다. 엘로이즈의 주도 하에 세 사람은 빠르게 친구가 되었지만, 그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같은 괴로움을, 고통을, 차별을 겪는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쯤 보면 영화의 결말은 당연한 순리를 따른 것 같다. 세상의 불합리한 규칙을 바꾸지 못한 개인은, 열망과 희망을 묻어두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그렇게 그들은
 가부장제라는 거대하고 오래된 체계를 부수지 못하고 제각각 흩어지고 만다. 이처럼 사회를 이겨내지 못한 개인의 저항은 무의미한가? 아니다.
 마리안느가 아버지 이름으로 출품한(남성만 출품 가능하므로)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것이라고 당당히 소개하던 모습을, 엘로이즈가 하인 소피와 친구가 되던 모습을, 소피가 현재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던 모습을, 당신은 기억하겠지. 세상이 어쨌든 그들의 애씀을 당신은 기억해야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게임의 목적이 달랐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