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단 Jan 29. 2020

우리는 게임의 목적이 달랐어

영화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여기, 욕망으로 뒤섞인 세 여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리숙하고도 나약한

영국 왕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앤, 남 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있음에도 항상 위축되어있다.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모른다. 통풍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앤은 자신감도, 자부심도, 자기애도 부족하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몸을 기대어야 절뚝이는 다리를 지탱할 수 있다. 휠체어나 목발에, 혹은 다른 사람에게. 그중에서도 사라에게 가장 많이, 오래 의존했다. 사라에게 맡긴 것은 자신의 다리와 옆자리에 그치지 않는다. 삶 자체를 주었다. 그러니 앤이 허수아비처럼 여기저기 휘둘리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삶의 중심에 자신을 두지 못하는 대신, 그곳에 사라가 자리 잡았다.



#음악과 춤, 앤의 다리

여기까지만 보면 불쌍하고 어리바리한 앤이 사라라는 못된 존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가고 있었구나, 싶겠다. 그러나 곧 이 생각이 아주 틀렸음이 밝혀진다. 복잡한 정치 문제를 다 제쳐두고 기분 좋게 무도회장에 들어선 앤. 즐거운 음악에 맞춰 몸을 들썩이던 앤은 이내 굳고 만다. 두 발로, 장내를 휩쓸며 춤추는 사라와 어떤 남자. 발이 묶인 자신과는 달리 사라는 자유롭다. 언제든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앤의 콤플렉스가 폭발하듯 터졌다.

앤은 질투한다. 동시에 두렵다. 앤의 행동은 한 다섯 살 배기 어린아이 같다. 기분이 상한 나머지 사라의 뺨을 때린다. 불같던 사라는 한순간에 변한다. 앤의 비위를 맞추며 어르고 달랜다. 익숙하다는 듯이. 앤 또한 당연한 수순처럼 마음을 푼다.



#대가

빛나는 것 하나를 얻으려면 수만 가지를 감내해야 한다. 이 만고의 법칙을 사라는 앤의 옆을 차지한 매순간 느꼈을 것이다. 이런 그의 앞에 쫓겨난 귀족, 아비게일이 떡하니 나타난다. 살금살금 그 자리를 뺏으려드는 게 얼마나 어이없겠는가.

아비게일은 거짓말에 능하다. 그가 귀족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거짓말 덕분이다. 사라를 이겼다고 생각한 그는 귀족의 삶을 누린다. 술을 퍼마시고, 주정을 부리고, 앤을 다루기 간단한 존재로 여기며 은근슬쩍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앤은 더이상 바보가 아니다. 아비게일이 듣기 좋은 거짓말로 양분을 충분히 준 덕분에 그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자신의 의견이 생기고,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의 힘을 인지한다.



#우리는 게임의 목적이 달랐어

아비게일의 목적은 '사라 자리를 차지하며 귀족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목적이 너무 간절했던 탓인지, 너무 쉽게 일이 풀려서 자신만만했던 탓인지, 뒤따르는 책임에 대해선 생각지도 않은 것 같다. 당신을 이겼다고 말한 아비게일에게 사라는 답한다. 우리는 게임의 목적이 달랐어.


사라의 목적은 무엇일까. 앤의 곁에서 쫓겨난 사라는 앤에게 보낼 서신을 쓴다. 편지를 쓰고 버리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하나를 완성한다. 사라는 예상했을 것이다. 서신이 앤에게 닿기 전, 아비게일이 읽고 태워버릴 수도 있다고. 그러니 편지의 내용은 오롯이 앤을 향한 말만은 아니었을 거다.

앤과 아비게일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다. 앤은 생각도, 의견도, 판단능력도 뭣도 없이 국가의 최고 자리를 고수했다. 어떤 결정에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놀 생각뿐이다. 그러나 이제 거짓으로 가득한 아비게일을 곁에 두면서 책임지는 법을 배울 것이다. 아니, 이미 배우고 있다. 앤이 생전 열지도 않던 책을 들여다보며 나랏일을 하려 하고, 친구처럼 대하던 아비게일에게 명령을 내린다.

거짓말과 요령으로 위기를 모면하던 아비게일은 행복하고 편한 귀족 생활이 아닌, 앤의 수발을 드는 신세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앤에게 무릎 꿇고 명령에 복종하며 사라를 떠올렸을까. 그가 말했던 게임의 의미를.

사라를 추방시키고 아비게일이 토끼를 짓밟던 것을 본 순간, 앤은 느꼈을까. 듣기 좋은 거짓을 곁에 두게 되었다고. 방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생각했을까. 이제는 자신이 감내해야 한다고.



#엔딩

사라와 아비게일은 각자의 자리를 건 게임을 했다. 둘 다 승자이자 패자이다. 이 말은 곧, 사라도 감내해야 할 대가가 있다는 의미다. 손실 크기만 보면 사라가 가장 크다. 무려 영국에서 추방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사라는 바닥에서부터 올라갈 준비가 되었으리라. 대가와 성취, 그 사이를 노니며 쥐락펴락 해왔던 사람이니까. 물론 앤과 아비게일은 꽤 지난한 과정을 견뎌야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어메이징 에이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