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를 찾아줘>
원제는 Gone girl. 원작은 소설. 평범한 로맨스물이라고 생각해서 보지 않았던 영화. 하지만 이건 사랑 영화가 아니라 복수 영화다.
복수를 소재로 하는 모든 이야기는 짜릿하다. 특히 벌을 받는 대상이 악하면 악할수록 그의 몰락이 달갑고, 재밌고, 어쩔 땐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묘하게 아쉬운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아, 이걸 복수라고 한 거야? 쟤가 뉘우친다고 끝이야? 사람 좋은 척할 거였으면 복수를 왜 했담. 잘못을 정량화할 수 없으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직하게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점을 찍고 있는 상대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결말로 주인공이 겪은 수모와 분노를 퉁치는 건 동의할 수 없다. 죽음으로 끝을 맞길 바랐던 건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게끔 만드는 면죄부니까.
이렇게 서문을 열면 못된 건가. 글쎄, 잘못한 놈이 불행 속에 살길 바라는 게 나쁜가.
현실에선 잘못한 놈들이 떵떵거리며 살고, 짓밟힌 사람들이 죽음과 비슷한 삶을 살지 않나. 완벽한 복수를 바라는 건 답 없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갈증해소다. 현실이 공정하면 이렇게까지 파멸을 바라진 않았을 거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랬으니까.
자, 잡다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대체 이 영화의 매력이 뭔지 적기로 한다.
들어가기 전, 이야기 도입부
오늘은 에이미와 닉의 결혼 5주년 날이다. 그런데 남편 닉은 썩 행복한 표정이 아니다. 쌍둥이 동생 마고와 이야기-정확히 말하자면 에이미 뒷담화-를 하다가 닉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에이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유리가 깨진 테이블. 몸싸움의 흔적일까. 그는 에이미가 납치되었다고 생각하고 실종 신고를 한다. 형사가 집을 살펴보던 중에 clue one이라는 종이를 발견한다. 에이미가 결혼기념일마다 하는 보물 찾기의 단서였다. 단서는 닉을 살인범으로 몰고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에이미의
설계도
영화가 재밌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여태껏 본 적 없는 통쾌함. 그 통쾌함을 만들어 낸 에이미가 정말 좋았다.
그는 똑똑한 수준을 넘어서 소름 끼치는 계략가이다. 제정신이 아니기도 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위기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변수를 이용해서 다른 결말을 만들었다. 에이미는 단서를 뿌려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다음 행동을 정하고, 이것들이 맞물려 하나를 가리키게 만들었다. '에이미를 죽인 건 남편 닉이다!'라고.
처음엔 에이미가 만든 결말이 퍽 마음에 들진 않았다. 징글징글한 닉과 결국 같이 살기로 한 거니까. 왜 돌아온 걸까. 아, 물론 돌아오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지이긴 한데 꼭 같이 사는 걸로 결정해야 하나? 현명한 에이미라면 다른 방향으로 끝을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다. 닉이 에이미를 무서워하고 쩔쩔매면서도 최선을 다 해 에이미에게 맞춰 주는 모습. 닉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게 아니었을까. 자신이 자살함으로써 닉을 감방으로 보내는 계획보다야 훨씬 낫다. 복수를 죽음으로 끝내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뻐할 수도, 새롭게 시작할 수도,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데.
또 에이미의 선택이야말로 끝장나는 복수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 테니 말이다. 수사는 종결됐고, 변호사도 떠났고, 에이미와의 연기 덕에 닉은 돈도, 명성도 생겼다. 에이미를 거부할 이유는, 아니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없다. 에이미가 닉이 좋아하던 '쿨 걸'인 척 애썼으니 이젠 닉이 에이미에게 맞출 차례가 왔을 뿐.
불쌍하지
않은
사람들
당한 남자들이 불쌍한 적은 단언컨대, 한 순간도 없었다.
에이미가 차려 준 바를 쌍둥이 동생과 함께 운영하는 닉. 차도, 집도, 일터도 에이미의 명의이다. 그가 해고된 후로 했던 일은 게임을 하고, 돈을 써대며 자신의 어린 제자와 놀아난 것.
에이미가 만약 이런 복수를 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냥 불쌍한 피해자로 사는 게 전부였겠지. 자신이 그에게 맞춰 온 세월을 가엾이 여기면서. 그래서 난 에이미의 미친 짓이 달가웠다. 그 미친 짓이 오로지 닉의 잘못 때문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잘못 한 사람이 벌을 받는, 세상의 이치.
데시의 경우도 그렇다. 도구로 이용되어 죽음을 맞이했지만, 본인이 에이미를 괴롭힌 세월에 비하면 달디 단 결말이다. 데시는 자신이 '생각하는' 에이미에게 집착했다. 금발에, 상냥하고, 똑똑하고, 날씬한 몸에, 곱게 화장을 하고, 보기 좋은 옷을 입은 에이미. 그 모습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예전의' 에이미로 돌아가길 바라며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꼴은 얼마나 가증스럽던지. 에이미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착각과 그를 '가졌다'는 오만함으로 뭉친 그. 징글징글한 집착을 보이며 끝도 없이 쫓아다니더니 한 번 정도는 도움이 되는구나. 데시가 에이미의 진심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손을 쓴 건 천만다행이었다. 에이미의 모습이 가짜인 게 밝혀졌더라면 피를 철철 흘리는 건 그가 아닌 에이미였을지도.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데시는 에이미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본인은 숨이 붙어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이라고 믿었겠지만. 상대를 구속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려는 게 무슨 사랑인가.
에이미의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에 환호하는 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뭐,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을 좋아하는 게 미친 건가? 현실은 정반대이지 않는가. 남편의 외도에 찍소리도 못하는 와이프, 남에게 당하기만 하고 이용할 줄도 모른 채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애인의 도를 넘은 집착에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 반가울 수밖에 없는 어메이징 에이미.
끝으로 네이버 영화 명대사에 없는 게 의문인 독백-너무 길어서 그런가-을 옮겨 적으며 마친다. 에이미가 휴게소에서 머리를 자르며 시작하는 시퀀스.
수 만 번
리플레이
하고 싶은
쿨걸 모놀로그
'쿨한 여자'.
남자들은 '쿨'이라는 단어를 칭찬으로 쓰지. 그 여자는 쿨해.
쿨한 여자는 섹시해.
쿨한 여자는 잘 맞춰 줘.
쿨한 여자는 재밌어.
쿨한 여자는 남자한테 화도 안 내. 그저 사랑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남자 거시기에다 입을 갖다 대지. 스타일도 남자 취향에 맞춰.
닉을 처음 만났을 때 닉은 쿨한 여자를 원했고 난 닉에게 맞춰주려고 애썼어.
음모를 다 밀었고, 애덤 샌들러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셨고, 차가운 피자를 먹으면서 날씬한 몸을 유지했어. 원할 때마다 자줬고, 그 순간에만 집중하며 Fucking하게 다 맞춰줬다고.
근데 닉이 게을러졌지.
더 이상 내가 결혼한 남자가 아니었어.
맹목적으로 자기를 사랑해주길 바라고선 날 촌구석에 데려갔지, 빈털터리로. 그리고 본인은 젊고 발랄하고 '쿨한' 여자랑 바람을 폈어. 닉이 날 망치고 행복하게 살게 놔둘 줄 알았어? No fucking 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