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단 Mar 04. 2019

지극히 인간다운 존재들

책 <프랑켄슈타인>



아직도

읽어봤나요?


종이의 끄트머리를 찢었다. 여기저기서 재밌다고 주워들은 책 제목을 적고 도서관에 갔다. 그 리스트 중 가장 첫 번째에 적었던 책,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 이상하다. 이 기시감은 뭐지. 낯익다는 게 낯설었다. 표지를 넘겨 두어 페이지를 읽었다. 처음 보는 책 맞는데 왜 '프랑켄슈타인' 이 단어가 새롭진 않지? 읽는 중에도, 다 읽은 후에도 이유를 몰랐다. 해설의 첫 장을 읽고서야 깨달았다. 아! 좀비vs식물 게임에서 나오는 좀비 생김새도 이 프랑켄슈타인 이미지 닮았어!

땡. 틀렸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지 괴물 이름이 아니니까. 흔히들 아는 그 이미지를 떠올렸더니 책을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사 반응처럼 프랑켄슈타인이 바로 튀어나오더라. 고착된 이미지가 이리도 무섭다.


표지 뒷면에 과학소설이라고 적혀있어서 조금 고민스러웠다. 아, 나 과학 낯 가리는데. 뼛속까지 문과인데 이해나 할 수 있을까. 걱정과는 달리,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걱정이 쓸데없을 정도로 술술 페이지가 넘겨졌다.


표현이 단조롭지 않다. 그러나 군더더기 없다. 특히 풍경과 심리 묘사가 많은데 어쩜 이리 깔끔하게 문장을 다듬었을까. 어쩔 땐 내용 전개는 둘째치고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봤다.

아주 가끔, 잘 쓴 시를 보면 종이 위에 놓인 글자가 툭툭 튀어나와 눈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글자가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 예를 들자면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그러했다. 멋들어진 단어라서 그런 게 아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 얼마나 평범한 말들의 조합인가. 그러나 그것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면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된다. <프랑켄슈타인>을 읽던 중에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체만 좋은가? 아니다. 좋은 문체가 살아 움직이려면 사건의 흐름이 매끄러워야 한다. 지지부진한 전개도, 너무 가쁜 호흡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리 중도에 걸맞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 여운에 허우적거리느라, 일명 콩깍지가 낀 상태에서 보내는 찬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글자가 내 눈에 뛰어다니는 느낌은 분명했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표현 같지만, 그건 아니다. 정말 좋은 글은 종이에 갇혀있지 않는다. 툭툭 나와서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독자로서 황홀경에 빠지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래, 이 맛에 재밌는 책을 찾으러 다니지.


장대한 서문의 결론은 그거다. 이 책을 안 읽어 봤다면 당장 도서관이든 서점이든 이북 사이트든 달려가시라고. 그리고 끝내주게 재밌는 책 읽으며 황홀경을 느끼시라고.


책 판매자 같은 서문을 뒤로하고, 이제 감상을 나눠보려고 한다.





다름을

인정 못하는 인간


가끔 내 눈이 역겨울 때가 있다. 생김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눈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면, 곧장 묘사를 할 수 있다. 수초가 가득 담긴 둥그스름한 어항, 먼지가 쌓인 책장, 보풀이 생긴 후드 집업,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볕. 이것들은 나로 하여금 어떤 감정이나 생각, 기분을 만들고 바꾼다. 수초 너무 많아서 물고기들이 보이질 않네. 답답해. 어제 청소했는데 먼지가 또 쌓였어.... 편한 옷은 왜 편하게 입을 수 없는 거지? 아, 여름도 아니고 해가 저렇게 쨍하다니. 그래도 해를 봐야 건강하다니까 눈 감고 있자.

무생물에겐 이런 평가가 문제가 되지도,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다. 그러나 생물, 특히나 인간을 바라보는 눈은 사회 영향을 받아 때로 지나치게 평가질을 한다. 인간이 서로에게 가장 먼저 평가질 하는 건 생김새와 행동. 나는 특히 후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행동거지가 오버스럽거나 스킨십이 진한 사람을 꺼린다. 왜 저래. 부담스럽게. 아, 집에나 가고 싶다. 이 생각을 떨쳐내려고 계속 나를 다독인다. 그 사람의 행동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다. 무례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와는 다르구나, 하고 넘기면 되는 수준의 오버스러움과 스킨십. 그런데도 스스로 받아들이라고 세뇌시켜야 한다는 게 우습다.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모습을 그대로 하는 나.


오두막집에서 괴물을 보고 기겁하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라면 그들은 생김새를 보고 그랬던 거고, 나는 행동이었다는 것.

눈이 안 보이는 드 라세와 괴물은 퍽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눈은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똘똘 뭉치게끔 만든다. 모든 것을 보지만,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력을 잃고 싶어 하는 건 당연히 절대 아니다. 내가 잃고 싶은 건 선입견과 편견이다. 타인을 알아가려 하지 않고 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짓고, 선을 긋는 일련의 행동을.





나약하고

무책임한 인간


살인범은 괴물만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도 공범이다. 그에게 칼을 양 손에 쥐어주고, 마음껏 휘두르도록 종용한 장본인이니까.

프랑켄슈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하다. 이 정도 뚝심도 능력이라고 쳐야 하나.


본인이 공부하다 '와! 내가 창조물을 만들 능력이 있다니 천재다! 나의 관심사, 인간을 만들자' 감탄하고선 연구에 골몰한다. 걱정하고 있을 가족? 알 바 아니다. 천재적인 내 연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그런데 막상 다 만들고 보니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의 몰골이 아닌 거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거구를 가진 괴물.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말도 안 돼! 충격으로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시간이 지나고, 잔뜩 쫀 채로 집에 들어선다. 아악. 문 열면 바로 그 괴상한 생명체가 있을 거야. ....어? 없네? 진짜 없어? 아싸! 도망갔나 봐. 난 이제 모든 공포에서 벗어났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시작이다. 죄 없는 동생이 죽고, 누명을 쓴 하인이 죽는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에 대해 한 마디도 벙끗하지 않는다. 뭘 해보려는 시도도 없다. 그저 불안에 떨고, 죄책감에 시달릴 뿐. 망할 괴물 때문에 불쌍해진 나, 가족.

그러다 괴물과 만난다. 그가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척박한 환경을 버텨내며 살아온 이야기, 틈 너머로 인간의 말과 목소리를 홀로 깨우친 이야기, 용기를 내어 모습을 드러내자 자신을 죽이려 든 오두막집 사람들. 그리고 부탁을 한다. 당신은 어쨌거나 내 조물주니까 나와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달라고. 그러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조용히 살 거라고. 협박도 빼먹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죽일 거라고.

프랑켄슈타인은 어설픈 동정, 그리고 그의 협박에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바로 후회한다.

최대한 미루고 미뤘지만 결국 얼추 완성되었다. 근데 얘가 말도 안 통하는 괴물이면? 그래서 저 둘이 사람들 다 죽이고 다니면? 두려움에 제 손으로 죽인다.

괴물은 분노한다. 그리고 약속을 이행한다. 프랑켄슈타인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일제히 죽음을 맞이한다. 친구, 결혼을 약속한 사람, 동생, 아버지까지 모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뒤쫓는다. 하지만 괴물을 죽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죽는다.


이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 적이 없다. 심지어 마무리까지 못한다. 인간은 누구나 추악한 면이 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추악함만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그를 비판적인 시선에서 보지 않았다. 무서우면 그럴 수 있어. 가장 나약한 본성이 튀어나오니까. 그래, 나 같아도 훗날이 걱정돼서 똑같은 생명체를 만들 순 없었을 거야. 그런데 그가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과연 모든 것이 괴물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의 시발점은 프랑켄슈타인, 그의 무책임함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초자연적인 상대를 앞에 두면 누구나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두려움이 그의 모든 잘못을 면제해주는 골든 키는 아니다. 그는 깨닫기나 했을까. 자신의 무책임과 무지함이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라고.





인간과 괴물

그 가운데


괴물이라지만 어린아이 같았던, 그저 사랑받고 싶어 하던 존재. 책에서 나오던 수많은 인간들과 이 괴물의 다른 점은 무얼까. 생김새와 탄생 과정, 이것뿐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멸시와 천대, 고통이 자신에게 주어진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던 괴물. 그는 오두막집 사람들의 따스한 눈빛, 애정 어린 몸짓을 보며 처음으로 사랑을 눈으로 보고, 배운다. 그리고 자신도 그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 채워 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사랑하기엔 상처가 너무 많아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줄 대상을 찾는 거다.

어쩌면 괴물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뭔지 몰랐을 수도 있다. 서로가 나누는 사랑은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그걸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지 않았을까. 하긴, 알 턱이 있나. 결국 괴물은 죽을 때까지 사랑이 담긴 말, 하물며 눈짓이라도 보지 못했는데. 기구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짧은 생이었다지만, 딱 하나의 바람만 가지고 제 나름껏 최선을 다 한 존재인데. 심지어 조물주인 프랑켄슈타인보다도 성숙하다. 그가 책임지지 않은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고, 누군가 그의 시체를 연구해서 또 불행이 반복될까 봐 불구덩이 속에서 죽기로 했으니까.


괴물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프랑켄슈타인이 약속을 파기하고 자신의 짝을 죽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상실감과 분노는 얼마나 컸을지. 프랑켄슈타인이 반신반의하며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 있을 때 괴물은 이미 그 존재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형체도, 생김새도,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존재를. 오두막집 가족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들을 나눠주려고 했을 거다.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책을 읽어주고, 식사를 함께하고. 그렇게 시간이 쌓였다면 웃음도 나눌 수 있었겠지. 상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안타깝다.


괴물과 프랑켄슈타인은 서로를 낭떠러지로 몰았다. 먼저 떨어진 건 프랑켄슈타인. 그를 등지고 절벽에서 멀어질 수 있었던 괴물도 긴 어둠 속에 뛰어들었다. 그에게는 현실이 절벽보다 나은 점은 단 하나도 없었을 거다. 자신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퍼부었고, 자신과 사랑을 나눌 존재는 더이상 없다. 그에게 남은 건 살아있는 자들의 혐오와 공포이다. 삶이 의미 있을까? 그가 바랐던 건 사랑뿐이었는데 얻지도 못한 채 전부 잃었다. 한없이 불행한 괴물, 괴물이자 인간.




내 영혼은 평화로이 잠들 것이고,
행여 영혼이 생각을 한다 해도
설마 이렇지야 않겠지.
이만 안녕히.




인간의 죽음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존재의 죽음은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캐롤> : '나'로서 너를 마주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