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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Mar 14. 2021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영화 <윤희에게>

장르에도 취향이 있듯 관람 포인트를 짚어내는 데에도 취향이 묻어난다. 영상미, 연기, 소품, 의상, 음악 등 여러 요소 중에서 나는 캐릭터를 주의 깊게 본다. 배우의 연기 말고, 캐릭터의 성격이나 습관, 관계를 이미지로 제시하는지가 관건이다.


왜, 그런 영화들이 있지 않은가. 글을 그대로 가져와 이미지로 옮긴 느낌의 영화. 그 캐릭터라서 가능한 전개임을 보여주지 않고 단순히 사건과 정황만 나열된다. 내용을 알려줄 테니까 빨리 따라오라는 듯이. 글이었다면 재미없는 부분은 대충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감독이 짠 흐름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이처럼 소설() 영화(이미지) 표현방식이 다르다. 하나는 인물의 생김새, 관계, 상황 등을 상상으로 그려내고, 다른 하나는 직접 보고 들리는 정보를 바탕으로 파악한다. 글의 강점은 이미지의 약점이고, 이미지의 약점은 글의 강점이다. 결국  형식의 강점을 제대로 활용하면서 약점을 숨기는 일은 스토리텔링만큼 중요하다.


오늘은 캐릭터의 특색보다는 이미지로서의 영화에 집중하여 <윤희에게>를 읽어보고자 한다.



네이버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며 소설 「쇼코의 미소」를 떠올렸다. 겹치는 설정이 많다. 학창 시절을 공유한 둘, 한국인과 일본인, 끊겼던 연락, 우연히, 바랐던 대로 서로를 마주하는 둘. 여기에 엔딩의 느낌까지 덧붙일 수 있겠다. 큼직한 줄기는 같아도 세부 가지는 다르다. <윤희에게>의 윤희와 쥰이 「쇼코의 미소」의 쇼코와 '나'보다 나이대가 높고, 집안 환경이나 배경도 상반된다. 즉 두 사람이 나누는 정서가 닮았지, 인물을 나타내는 성격이나 키워드는 제각각이다.


하나 더, 영화는 현재만 오롯이 담아내어 윤희와 쥰의 과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진, 편지, 혹은 주변인의 몇 마디를 통해 얻는 정보가 전부다. 두 사람의 과거를 풀어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들도 이렇게 연애했을까’ 떠올리게 하는 새봄과 그의 연인 경수가 나오는 데다가 윤희의 삶은 앞으로 미래를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영화를 쭉 훑어본다. 주인공 윤희, 공장에서 배식 도우미로 일하며 열아홉 된 딸 새봄과 함께 산다. 남편과 사별한 건 아니고, 이혼했다. 마흔 언저리쯤 되었을까. 그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도 기분을 전환하는 방법은 몰래 담배를 피우는 것뿐인 듯하다. 고달픔은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 지친 모습이다. 겨울의 시린 공기와 닮았다.


무미건조한 눈빛과 고요함. 딸 새봄은 이런 윤희에게 온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편지.



네이버 영화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 지났으니까.



고모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고모가 충동적으로 우편함에 편지를 넣지 않았다면, 닿지 못했을 러브레터. 쥰의 고모가 둘 사이의 선을 하나 만들고, 딸 새봄은 그 선을 이어받는다. 그들이 꽤 적극적으로 움직인 건 호기심 내지는 호의였을 테다. 이렇게 짙은 마음을 보고도 모른 체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덕분에 윤희와 쥰은 꿈에서만 보았던 서로를 두 눈으로 확인한다.


쥰의 편지를 본 이상 여행을 가자던 새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떨림과 설렘, 두려움. 이 복잡한 감정은 윤희가 매일 꾸역꾸역 삼켜내던 배식 일까지 그만둘 충동심을 만든다. 윤희에게 충동은 무모함이고, 무모함은 곧 용기다. 사랑하는 쥰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도 부정하며 살아온 윤희. 해야 할 일에 둘러싸인 지 20년,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 믿고 세상의 잣대를 거부해 본다. 그렇게 윤희와 새봄은 쥰이 있는 일본에 도착한다.



네이버 영화



영화 초반에 나왔던 새하얀 세상이 다시금 이어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색으로 꽁꽁 싸맨 윤희는 흰 눈 위에서 툭, 존재감을 드러낸다.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이미지의 강점이다. 눈부신 설원, 아즈넉한 나무로 꾸며진 카페, 포근한 햇살과 닮은 노란 무늬 고양이, 점차 차오르는 달, 순간을 선명히 간직하는 필름 카메라. 사물이 인물의 배경을, 때로는 대화를 채운다.


이 영화의 특징이다. 캐릭터들은 무난하고 무던하다. 각자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소품이나 행동은 거의 없다. 대신 영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미지로 활용된다. 새봄이가 매일 목에 걸고 다니는 윤희의 필름 카메라. 빛바랜 색감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케케묵은 그리움을 꺼낸다.


쥰의 고모와 새봄의 합작으로 여행 마지막 밤, 윤희와 쥰은 서로를 마주하고, 멈추어 선다. 윤희는 이른 아침, 쥰의 집 앞까지 찾아왔다가 쥰이 나오자마자 몸을 숨겼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올까 봐 두려워 입을 꽉 누르고서. ‘윤희니?’ 이번에는 누구도 도망가지 않는다. 윤희는 입을 가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웃어 보인다. 이 순간, 한 뼘 자라났다는 것을 윤희 본인은 알까.


둘의 만남은 모두가 예상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한 마디도 담기지 않는다. 윤희를 확인하는 쥰의 목소리와 짧게 웃음을 터뜨린 윤희의 목소리, 밤길을 나란히 걷는 그들의 뒷모습이 기억될 뿐이다. 그들의 소통방식은 대화가 아니라 편지이다. 편지는 일방적인 수단이다.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쓰는 이가 하고 싶은 말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각자를 숨기며 살아야 했던 둘에게 딱 맞는 소통 방식이다. 비로소 단조로운 플롯이 살아난다.


여행을 마친 윤희와 새봄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만 이전과는 다르다. 윤희는 과거의 고통을 끊어내고, 새봄과 서울로 이사하고, 식당을 차리겠다는 꿈도 생겼다. 이 커다란 변화의 중심에는 쥰이 있을 테지만, 어떤 말을 나누었을지 궁금해하진 않으련다. 그 속닥거림은 둘만의 것이니까.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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