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단 Mar 22. 2021

진실 같은 루머, 루머 같은 진실

'사실'은 관심 없는, 영화 <헌트>

창작물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처음, 늦어도 1/10 분량이 나오기 전에 주인공이 등장하는 . 뻔한 전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배려다.


상상해보자. 어떤 영화를 처음 보았을 , 제공사들의 로고가 끝날    이어지고, 소리 혹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변화로 영화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초반에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바쁘다.


분주하게 걷는 발이 나온다. 밝은 실내인  같다. 복도인가? 주변에 사람이 많은지 여러 목소리가 섞여 웅웅댄다. 발이 멈추어 서고, 인물의 얼굴이 드러난다. 냉랭한 표정. , 무슨 일이지? 얼굴에 상처도 있다. 다친 건가. 누구랑 싸웠나?


 교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셨다. 소설의 독자는  태어난 새끼 오리이고, 소설의 주인공은 어미 오리라고. 영화마찬가지다. 관람객은  태어난 새끼 오리이고, 영화의 주인공은 어미 오리다.


세상에 처음 태어난 존재들은 얼마나 무지한가. 온통 새롭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인지하기 바쁘다. , 위험에 처하기  좋은 상태다. 이럴  믿고 따라야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오리는 눈을 마주친 존재를 '엄마'라고 여기며 쫓아다닌다. 자신이 헤매지 않게 도와줄 존재라면 실제 어미 오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시작하고, 갑자기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이며 의지할 구석을 찾는다. 이때, 첫 등장인물을 반갑게 마주한다. 저 사람이 주인공인가? 처음엔 살짝 의심하다가도 초반에 지속적으로 나오면 주인공이라고 여긴다. 이제 몰입이 시작된다. 주인공이라고 간주한 그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상황을 파악해본다.


그렇다. 보통 영화라면 이런 전개로 흐르니 이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그런데 여기 새끼 오리들을 잠시 헤매게 만든 영화가 있으니, <더 헌트> 되시겠다.



유니버설 픽처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작은 단체 대화창이다. 테드, 리처드, 피터, 리버티, 미란다,... 빠르게 쏟아지는 이름과 대화들. 한 사람이 움짤을 공유한다. 거북이의 배를 발끝으로 치면 거북이가 입을 벌리는 움짤. 채팅방 사람들은 깔깔대다가 의미심장한 말을 주고받는다. 그래도 이제 사냥할 시간이다, 저택에서 보잘것없는 것들을 쓸어버리는 게 최고다. 이 인물은 누군지 이름도, 생김새도, 심지어는 뒤통수도 안 보인다. 짧게 터뜨린 웃음만이 전부였다.


화면은 비행기 안으로 바뀐다.  승객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는 장난을 치고, 승무원은 능숙하게 대처한다. 소수의 사람만 있는  보아 전세기인 듯하다.


이때 몸집이  남자가 어설픈 걸음으로 걸어 나온다.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어리둥절하다. 너무 일찍 깼어.  승객이 말을 반복한다. 다른  명이 나서서 승무원에게서 펜을 빌리고, 남자를 바닥에  수건 옆에 뉘인다. 그리고 목을 찌른다.


모두 경악했지만, 이상한 기시감이 있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미리' 처리했다는 사실에 고함을 지른다. 가만 보니 승객들은 서로를 안다. 남자의 시신은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옮겨진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여성이 엎드린 채 기절했다. 아무래도 아까 대화창에서 보았던 '인간 사냥'인 것 같다.


이번엔 기절했던 여성이 숲에서 눈을 뜨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자물쇠 때문에 마음대로  수도 없다. 공포에 질린 눈은 주변을 살핀다.


가까운 개울에 'crystal'이라는 이름표를 가진 여성이 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고, 묵묵히 나뭇잎을 물에 띄운다. 재갈이 물린 상태인데도 침착하다. 하는  없이 여성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들판이다. 여기는 이 여성처럼 입에 재갈 문 사람들 천지다. 들판 가운데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있다. 모자 쓴 남자가 용감하게 나서서 나무판자를 뜯어내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말린다. 그거 함정이라고. 말을 듣지 않자, 나머지 사람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구경한다.


힘겹게 상자의 한 면을 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웬 돼지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나온다. 몸에 폭탄이 둘러있지도 않다. 모자 쓴 남자는 상자 안에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는다. 확 끌려가는 게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손끝에 빨간 손잡이가 닿고, 커다란 무기 케이스를 꺼낸다. 겁에 질렸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린다. 이때 열쇠도 발견하여 서로 재갈을 풀러 준다.


유니버셜 픽처스



준비가  되었으니 서로 공격하라는 의미인가? 물음표가 난무하던 때에 갑자기 총알이 날아온다. 관람객이 보는 시점은 아직  여성이다. 거의 맞을 뻔했다고 말하던 여성은 진짜 총에 맞아 죽는다. , 주인공이 아니었던 거다.


그럼  여성의 옆에서 나름  도망치던   남자가 주인공인가? 그의 앞에서 총알을 피해 달리던 흑발 여성. 그런데 함정에 빠져 커다란 송곳이 배를 뚫었다.


그런데 웬걸. 남자가 달려가서  여성의 손을 잡아 함정에서 꺼내 준다. 송곳 덕에 그나마 지혈이 되었던 것일 텐데 여성은  커다란 것을 빼내고서 몸을 움직이기까지 한다. 액션/스릴러가 주를 이루는 영화는 아닌  같다. 겨우  걸음   사람. 그런데 남자가 지뢰를 밟아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옆에 있던 흑발 여성은 몸이  동강 났다.


이번엔 울타리 넘는 생존자 셋이다. 나름 속닥대지만 떠들썩하다. 저택에서 인간 사냥한다는 말을 인터넷에서 봤는데 진짜일 줄 몰랐다며. 울타리를 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주유소로 달려간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노부부에게 여기가 어딘지 묻고, 신고 전화를 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쉽게 경계를 풀었다. 어리숙해 보이던 그 부부도 한 통속이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점이 있다. 첫째는 아직도 주인공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냥하는 사람들과 사냥당하는 사람들  누가 착하고 나쁜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관람객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갈팡질팡 중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람을 처리한 노부부. 와이프는  시신의 손에 결혼반지가 있는 것을 보고 멈칫한다. 그리고 말한다. 자신들과 다를  없는  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말한다. 평범한  해도 인터넷에선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는 나쁜 놈들이라고. 그럼 사냥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을 처단하는 필요악일까?



유니버설 픽처스



드디어 주인공 비스름한 인물이 나온다. 극초반에 나뭇잎을 고고히 띄우던 크리스털이다. 노부부는 크리스털 손에 죽음을 맞이하고, 크리스털은 또 다른 생존자 돈과 합류한다. 사냥꾼의 흔적을 쫓아가면서 돈은 묻는다. 저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크리스털은 바로 대답한다. 어차피 우릴 죽이려고 하는데, 이유를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유심히 보아야 할 말이다.


생각보다 쉽게 사냥꾼 무리는 크리스털에게 역습을 당한다. 크리스털의 다소 엉성한 몸놀림을 생각하면 쉽다 못해 우스울 정도다. 거의 죽어가던 한 사람에게 돈이 묻는다. 이런 짓을 왜 하냐고, 왜 하필 우리냐고. 그러니까, 이유를 묻는다. 죽어가던 사람은 답한다. '예수님이 그러셨어.'


이 사람들 사이비인가? 아니, 이 영화의 정체가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골적으로 미국 정치를 풍자한 블랙코미디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고고하게 사는 소수의 엘리트층' 민주당과 '온갖 차별을 일삼는 문제 계층' 공화당의 다툼이라고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울 거다. 이 사실을 기억해 두고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소위 말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던 아테나와 그의 동료들. 아테나가 농담으로 꺼냈던 저택과 인간 사냥은 sns 타고 사실처럼 퍼지고 만다. 아니라고 설명을 해봤자 회사는 개인 사정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결국 대화창에 있던 모두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분노와 억울함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아테나의 주도 하에 거짓 소문을 퍼뜨린 주요 인물들을 진짜 사냥하고자 한다. 여기서 사냥을 당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공화당의 텃밭으로 알려진 미시시피, 와이오밍, 플로리다  거주민이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공화당, 괴소문을 사실로 만든 민주당, 인종차별주의자, 속내는 몰라도 겉으로는 신실한 종교인, 무식해 보이지만 의외로 똑똑한 공화당, 엘리트 대우받지만 의외로 엉성한 민주당. 등장인물들이 내내 보여주는 양극단이다. 영화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 그저 신랄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이 없어야 가능한 전개다.



유니버설 픽처스



블랙코미디인 걸 모르고 본 관람객에겐 꽤 허무하고 당황스러운 흐름이었겠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며 인물들을 이해해야 하는데 양쪽 다 유치하고 바보 같다. 게다가 루머로 시작한 이야기인지라 진실과 거짓을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영화를 다 보면 이런 물음이 남는다.


돈은 아테나의 동료가 아니었던 걸까? 아테나가 원래 데려오려던 크리스털 대신 다른 사람을 잘못 데려왔다는데 진짜인가? 크리스털은 샴페인을 마시고도 무사할까? 승무원 표정이 심상치 않던데, 크리스털을 죽이려는 것 아닐까? 과연 살아남는 사람이 있긴 할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이라면 얼마큼 진실인지, 거짓이라면 어디까지 거짓인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싸우고, 힘들면 잠시 쉬고, 또 싸우고. 처음엔 이유나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습관처럼 움직인다. 한쪽을 완전히 짓밟을 때까지, 그냥.

매거진의 이전글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