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은, 『스노볼 드라이브』
눈 알갱이가 깊숙이 박혔던 손바닥에는 꼭 흑설탕을 뿌린 것처럼 갈색 흉이 남았다. 최악을 상상하는 건 너무 쉽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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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8월 중순,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소설을 만났다. 정반대의 계절은 오히려 정확했다. 그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꽁꽁 싸맨 건 추위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이었으니까. 팬데믹 상황을 겪는 우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와 타인과 맞닿은 곳에 놓인 투명한 벽. 이 오묘한 동질감을 안고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소설은 녹지 않는 눈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 네 사람과 얽혔다. 백모루와 그의 이모 유진, 이이월과 그의 (새)엄마. 그들의 이야기는 모루와 이월의 관점에서 드러났다. 시작은 모루다. 실종된 유진을 찾는 모루. 모루의 이야기가 과거로 흐르고, 우리는 녹지 않는 눈의 시작점을 마주한다.
어느 6월, 백영중학교, 반짝이는 눈송이들, 그리고 비명소리.
한여름에 내린 함박눈에 들뜬 음성은 금세 날카로운 괴음으로 바뀌었다. 부딪히고, 소리 지르고, 뜀박질하고, 넘어지는 공포와 고통들.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모루는 아이들에게 치이고 밀려 또 한 번 바닥에 넘어지고 만다. 절망에 갇힌 순간에 훅 들어온 이월의 손. 그 손이 모루를 이 학교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장식장에 가득한 스노볼. 학교 이사장, 그러니까 이월의 엄마가 모으는 컬렉션에 모루가 관심을 가진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새엄마가 죽은 것도, 모루가 폐기물 센터에서 일하게 된 것도, 이모의 실종에 모루가 연관된 것도.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있고, 우리는 그저 휩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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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루의 이모, 유진은 트럭기사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눈길을 20년이나 달려온 사람. 희고 흰 찬란함이 눈에 담을 빛을 모두 빼앗아 갔는지, 녹내장 판정으로 유진은 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모에게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낀 모루는 도망치듯 폐기물 센터에 입사한다. 그곳에서 눈을 퍼내고, 태우고, 비슷한 또래와 시시덕대고, 먹고, 자면서. 주말에 집을 찾아가겠다고, 유진과의 통화에서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단 한 번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니 모루는 제 마음이 묵직한 거다. 미안함, 그리움, 짜증, 슬픔, 불안, 걱정.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준 건 이월이었다. 금요일 밤에 열리는 플리마켓, 보습제를 사겠다는 이월. 얼결에 내민 포도향 보습제는 센터 전체를 감싼 사과향 사이에서 남달랐다. 다만 방호복으로 무장한 센터 사람들은 '헛것을 보는 이상한' 이월의 냄새 따위를 인지할 리 없다. 재밌는 가십 거리이지, 신경 쓰는 대상이 아니다.
외관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모루는 당연하다는 듯 이월을 알아차린다. 모루는 이월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손끝이 맞닿았다. 무엇보다 그 기억들을 특별히 여겨, 포도향에 담았다. 모루는 알고 있을까. 후각은 기억의 감정까지 저장한다는 것을.
눈보라 속에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모루와 이월은 서로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준다. 인간은 참 우습다. 끔찍한 세상에 안녕을 고하고 싶다가도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내밀면, 비로소 반발심을 품는다. 그래서 희망은 절망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일단 남쪽으로 갈 거야."
남쪽, 나는 모루를 따라 소리 내어 보았다. 남쪽.
"남쪽에는 아직 포도를 재배하는 곳이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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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제 막 떠난 여행은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떠올리게 한다. 긴박한 상황, 훔친 차, 그리고 답 없는 세상에서 끝까지 달리는 두 여자. 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나아갈 것 같다는 확신과 믿음.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해나가며, 선택의 기로에서 최선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갈 모루와 이월. 스물두 살 동갑내기가 풍겼던 십 대의 어리숙함이 엷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여행에도 끝이 있다면, 그들은 지금과 아주 달라진 모습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