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톰보이>
언제였던가. 예전 일은 아니고, 올해 겪은 해프닝이다. 인사동 거리에는 거리 연주자가 하나 있었고, 나는 친구와 우산 혹은 양산을 쓰고 그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거리에서의 느긋함은 무언의 허락이 있다고 느끼는지, 연주자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노래를 하나 골라달라고. 생각나는 노래가 없다고 친구가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연주자는 계속 말을 붙였다. 노래를 고를 때까지 설득을 멈추지 않으려는 듯이. 여전히 나는 한 마디도 없이 가만히, 그를 쳐다만 보았다. 이때, 연주자가 한 마디 했다.
총각이랑 숙녀 분이신 거 같은데
사랑 노래 하나 해줄까요?
단 한 마디에서 사고의 연령대가 느껴졌다. 연주자가 손에 들고 있던 때 묻은 기타와 비슷할 테지. 적당히 말도 안 되는 말은 이모저모 따지고 묻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문장 전체에 오류가 있을 땐 차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래서 그냥 지나쳤다. 나는 총각이 아니라 여성이고, 숙녀는 존칭의 의미보다 고정관념이 그득하고, 여성과 남성만이 연인 관계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그나마 나는 가치관이 정립된 '머리 짧은 여성'이기에 온갖 말-머리가 언제부터 짧았어? 왜 잘랐어? 긴 머리가 더 예쁜데 왜 안 길러? 언제까지 짧은 머리로 살 거야? 왜 남자같이 머리 잘랐어?-을 그럭저럭 방어할 줄 안다. 그러니까, 개인의 머릿속에 박힌 사회적 인식이 문제라는 것을 알지, 내가 유별나다고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떨까. 사회에 찌든 보호자들의 말을 그대로 습득하고, 맞는 것과 틀린 것을 배워 이곳저곳에 적용하고, 나와 남을 구별하기 시작한 아이들은. 영화 <톰보이>에서는 그 상황을 전면으로 맞닥뜨린 '미카엘'과 그의 가족이 나온다. 아이들, 어른들, 그리고 사회의 모습까지 살펴보자,
운전대를 잡은 작은 손. 그 위에 얹어진 어른의 손. 어린아이가 운전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아빠는 태평하다. 중간중간에 잘한다는 추임새도 넣으면서. 그렇게 이사한 집에 둘은 도착한다. 이때 처음으로 아이의 전신이 보인다. 짧은 금발머리에 품이 큰 티셔츠와 바지, 운동화, 시원시원한 걸음. 영화 제목 덕에 우리는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긴장과 들뜸이 그대로 드러나는 저 금발의 짧은 머리가 주인공이라고.
새로운 학교에서 새 학기를 맞이하기 전, 짧은 방학. 미카엘은 동네 친구들의 대화 소리를 듣고 스리슬쩍 밖으로 나선다. 하지만 아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론가 떠난 모양이다. 이때 '리사'가 아는 체하며 말을 건다. 네가 여길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 그리고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함께가 힘을 겨루고, 뛰고, 장난친다.
다음 날엔 축구였다. 미카엘과 리사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멀찍이 서서 구경한다. 리사는 여자라서 아이들이 끼워주질 않고, 미카엘은 무언가를 공부하듯 남자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헐벗은 웃통, 팬티가 살짝 보이게 내려 입은 바지, 중간중간 침을 뱉는 불량한 모습까지. 미카엘은 침 뱉는 남자애를 보고 살포시 웃는다. 비웃음 같던 그 웃음에 동경이 살짝 섞여있다는 건 머지않아 드러난다. 오늘 자신이 보았던 모습을 집에서 그대로 따라 하는 미카엘을 보면 말이다.
미카엘은 왜, 남자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습득하고 따라 할까? 왜, 의도적으로 배울까? 남자가 '되고 싶은' 걸까?
어느 저녁, 미카엘은 엄지손가락을 입술로 문다. 그 모습을 본 아빠가 걱정된다는 듯 묻는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미카엘이 마음이 좋지 않을 때 했던 버릇일 테다. 아빠는 말한다. 어렸을 때 자신도 그랬다고. 그 말에 미카엘은 작게나마 웃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어른이 되면
그 느낌이 별로여서 안 하게 될 거야.
톰보이, '남자처럼 옷을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럼 영화에서, 아직 10대도 되지 않은 어린이들은 성별을 어떻게 구분할까? 미카엘이 친구들과 축구를 하던 장면에서 나온다. 미카엘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남자라고 말한 적 없다. 그러나 모두가 남자애처럼 대한다. 머리가 짧고, 바지를 입고, 화장이나 꾸미는 것에 관심 없고, 축구를 잘하고, 몸싸움하는 건 남자니까.
이것이 아이들의 생각일까? 아니, 사회가 가르쳤다. 그들이 우리처럼 자라나 어른이 되고, 그 어른들은 '사회'와 '세상'을 들먹이며 아이들에게 배움을 전파한다. 이를 반복하면 사회가 된다. 미카엘이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성별을 숨긴 건 남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을 했을 뿐이다. 누구도 자신의 행동, 말, 옷차림에 딴지를 걸지 않고, 제약은 사라지고, 마음껏 누빌 수 있다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불안하고도 행복한 시간은 금세 끝난다. 미카엘의 보호자, 엄마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장 가까이 지내던 여자 친구 리사도 미카엘이 여자인 것을 인지한다. 리사가 다른 아이들에게도 사실을 알렸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속인 사람이 있는데 누구도 속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더 엄밀히 말해서 미카엘은 자신이 남자라는 사회적 뉘앙스를 풍겼을 뿐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속였고, 속였다고 인정했는데 아무도 속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미카엘이 아이들을 속인 걸까? 배신감은 누가 느껴야 하는가?
부정은 조롱으로 이어져, 남자아이들은 적극적으로 미카엘의 성별을 증명하려고 한다. 리사는 그 폭력적인 상황을 저지하려 들지만, 곧 공격받는다. 여자끼리 키스한 건 역겹다고. 동감하지 않느냐고. 아직 세상에 발 디딘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겐 세상은 크고 위대하지 않다. 반 친구, 옆집 친구, 동네 친구가 곧 세상이다. 여기서 반대를 말하는 순간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이쯤에서 아까 아빠가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느낌' 앞에 생략된 수식어가 있다. 이상하다고 낙인찍히는 느낌이 싫어서 어린 시절의 버릇을 고치는 것이다. 엄지손가락을 입에 무는 감촉 자체가 싫은 건 부정당한 후에 딸려오는 느낌이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미카엘은 더 이상 밖을 나가지 않는다. 집 안에서 동생과 노닥거리며, 이게 좋다고 말한다. 이 마음이 사실이었다면 창밖을 내려다 보고, 홀로 서 있는 리사를 발견하지도 못했을 거다. 이상하게 리사의 모습이 낯설다. 평소에 입던 딱 달라붙는 티와 짧은 바지는 어디에 두었는지, 미카엘처럼 벙벙한 티와 바지, 운동화 차림이다.
천천히, 약간은 머뭇대는 미카엘의 발소리가 들리고, 둘은 서로를 마주한다. 정적을 꿰뚫고 리사가 묻는다. 넌 이름이 뭐야?
그리고 한참 머뭇대는 미카엘의 얼굴. 의중을 파악하듯 리사의 눈치를 몇 번 보다가, 바람 소리만 들리다가,
내 이름은 로레야.
말하고서 미소인지 모를 짧은 움직임이 영화의 끝을 장식한다.
러닝타임 한 시간 이십 분 동안 딱 한 번, 삽입곡이 있다. 리사와 미카엘이 신나게 춤을 추었던 노래. 가삿말이 겨우 4 단어뿐인 노래. 영화의 전부가 담긴 노래.
I love you always
나는 '너'를 사랑해. 언제나. 네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생각을 하든,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