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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May 27. 2019

당신의 자유

책 <환각의 나비>

인트로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처음 본 건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일 거다. 당신을 추억하는 섹션이 서점 한편에 마련되었는데, 나도 그곳에 머물다가 책 한 권을 집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마 노란색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을 테지.

내용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어렸던 탓일까. 옛 분위기가 어려웠다. 그 시절의 어투, 단어, 스토리, 모든 게. 그래서 엄두를 못 냈었다. 이 책을 읽고, 작가님의 다른 책을 읽겠다는, 그런. 그럴 생각이 안 들었던 것도 있지. 당연하다. 잘 읽히지 않는 이야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으니까.


기억하는 이미지는 문체나 소재가 아니라 작가님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 인상을 보고 있노라면, 아, 되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글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은 맞다. 문체가 부드럽고 간결하다. 그러나 강직하다. 마냥 부드럽고 편하지 않다. 무언가가 자꾸 턱턱, 걸린다. 말에 뼈가 있고 힘이 있다. 그걸 부드럽게 표현해낸다는 건 정말 놀랍다. 내 글에는 뼈밖에 없어서인지.



어머니의 삶

영주는 호박을 사며 어머니가 신나서 요리를 하기를 기대한다. 그는 사라진 어머니의 빨래 개는 솜씨를 그리워하고, 그의 남편은 어머니의 된장국을 그리워한다. 이렇듯 남은 자들의 머릿속 어머니의 모습은 늘 국한된다. 청소, 요리, 빨래, 집안일을 하는 어머니.


영주는 안다. 한평생 온갖 요리를 해왔던 어머니에게 호박범벅이 묘수가 아님을, 어머니를 모시겠다던 아들의 말에 자꾸 의왕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발걸음을. 그러나 방도를 모른다. 어디에 모셔야, 어떻게 모셔야 할지. 무엇이 예전의 어머니를 되찾게 할지.

아들의 집에서 어머니는 감금당한다. 어머니를 '관리'하는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방법이다. 어디든 마음대로 나갈 수 없으니 신경 쓸 일도 없어진다. 관리자의 입장에선 태클 걸 여지가 없는 대안이다. 어머니에겐 새장일지언정.


영주와 영주의 남동생, 영주의 남편, 영주의 자식들, 그들이 생각해 낼 만한 방도 따윈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자질이나 능력, 혹은 인성의 부족을 탓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 자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속했다는 사실.



가족이라는 울타리 혹은 족쇄

'그 집'에 간 어머니가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다. 그저 똑같이 밥을 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한다. 그런데 어머니의 모습은 확연히 전과 다르다. 영주의 눈에 나비의 날갯짓으로 보일 정도로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인다니 말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어머니와 어딘지 불안하고 알 수 없던 어머니. 외적인 차이는 두 가지이다. 장소, 그리고 사람. 아들의 집, 영주의 집에서 그 집. 영주, 영주의 남편, 손주들, 영주의 아들, 아들의 며느리에서 마금이.


평생 내 편, 핏줄, 사랑.

가족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대부분의 미디어는 이 면만 강조하며 보여준다. 마치 다른 감정,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은 가족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아, 다루기야 한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유난히 폭력적이거나 유난히 불행하거나 유난히 궁핍하다. 평범하지만 불행한 가족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가족이라는 게 어느 땐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천지에 나를 믿어 줄 사람이라곤 없을 때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줄 존재인 건 맞다. -물론 모든 가정이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늘 울타리가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족쇄다. 세상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내가 짓눌리고, 통제당하곤 하니까.

어머니도 비슷한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집에선 평화와 안정을 누리던 게 아니었을까.



당신이 나와 만드는 자유

많이들 그러하듯 나 또한 엄마를 보면 마냥 좋다가도 안타깝고, 때론 밉다가도 안쓰럽다. 나는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유를 누리고, 진심을 다해 웃고, 새로운 지식을 얻고, 새로운 장소를, 문화를, 세상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뒷바라지하는 삶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삶을, 홀로 강직하게 살아가기를. 뭐, 변변찮은 내가 누군가의 삶을 서포트해주길 꿈꾸는 것은 우스운 망상이긴 하다. 스스로 안다. 그래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책 속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꼭 대단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지 않고서도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풍요로운 삶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귀감과 즐거움을 선사하겠지. 하지만 거기에 얽매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움츠러들지 않아도 된다. 나아가려면 현재 위치를 알고, 여기서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찾고, 하고, 쌓아 가기.

다만 꿈같은 상상은 멈추지 않겠다. 언젠가 세상 모든 엄마가 당신들의 이름을 되찾아 살아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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