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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Jan 23. 2020

리코더는 투투투 불어야 해

영화 <리코더 시험>

공책에 꾹꾹 눌러쓴 투박한 글씨, 칠판에 적힌 단원평가, 낮은 책걸상, 알록달록한 책가방. 10대라는 말보다는 초등학생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시절. 그때를 꾸역꾸역 살아내던 은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영화는 은희가 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러닝타임 28분에 담긴 아이의 일상은 따스한 색감만큼 서글프다.



ch.1 은희의 가족

가족 구성원: 엄마, 아빠, 은희의 언니, 은희의 오빠, 은희. 5명.

엄마는 항상 피곤에 절어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자신의 남편은 바람났고,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고, 그런 남편과 작은 방앗간을 운영하며 아등바등 살고 있고, 식사를 비롯한 집안일을 도맡는다. 지칠 수밖에 없는 나날이다.

아빠는 어떠한가. 바람피우고, 큰소리치고, 권위적이고, 아이들을 챙기는 척 그들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특히 은희의 것을. 오빠의 폭력에 울던 은희에게 '우는 모습이 원숭이 같다'며 미간을 좁히고, 공부 안 하면 바보 된다며 아이를 꾸짖는다. 기껏 100점 맞은 시험지를 내밀면 형식적인 반응만 보인다. 잘했어. 국어나 수학, 영어가 아닌 미술이었기 때문일까.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가 아니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며.

은희의 아빠와 오빠는 공통점이 있다. 은희의 말과 행동을 갉는다. 전자는 방앗간의 분쇄기로, 후자는 연필깎이로. 커다란 소음이 은희를 자꾸만 집어삼킨다.

그러나 은희는, 우습게도 강하다. 아주 작은 새싹이라서 오히려 아주 작은 관심에도 충분히 살아난다. 옷장에 박혀 자던 은희를 깨워 이부자리를 펴준 엄마. 은희의 이상한 질문에 아이를 품으로 부른다. 은희는 기쁘게 안긴다. 은희는 마음껏 위로와 사랑을 받는다. 반대 방향으로 맞댄 얼굴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은희는 무표정한 엄마를 보지 못한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매일 아침 엄마를 제외한-아마 아침을 차리고 있어서 같이 운동 못하는 게 아닐까- 넷은 새하얀 체육복을 갖춰 입고 달린다. 신발끈이 풀린 은희의 운동화를 아빠가 묶어준다. 은희가 아빠의 정수리를 보는 건 꽤 낯선 일일 거다. 은희는 손을 뻗어 아빠의 머리를 만지려 한다. 살짝 닿기가 무섭게 고개를 드는 아빠. 예의 무덤 하고 신경질 난 표정. 은희에겐 너무 익숙한 모습. 그래서 은희는 개의치 않았을까, 움찔했을까, 아니면 멈칫했다가도 자신에게 관심을 준다는 사실에 조금은 기뻤을까.



ch.2 은희의 방

은희와 은희의 언니는 한 방을 쓴다. 둘째인 오빠는 자기만의 방이 있다. 나이 순이 아니라 성별 순이다.

방에는 작은 장롱 하나가 있다. 은희는 다리를 쭉 펼 수도 없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다. 언니가 데려온 남자를 피할 수 있는, 은희만의 방. 학교 책상 한편을 차지한 빛줄기, 복도 한편에 자리 잡은 빛줄기. 딱 그 크기다. 조금 작지만 안락하다.



ch.3 은희의 친구

은희의 친구 한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다리를 쭉 펴고도 남는 방, 피아노, 새 리코더,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오는 엄마. 한나 앞에서 은희는 들뜬다. 자신이 손수 오려 벽에 붙인 잡지 속 반짝이는 사람과 어울리는 기분일까. 동화 같은 집을 한데 모아 꿈동산을 만든다.



ch.4 은희의 리코더

리코더는 은희의 희망이자 절망이다.

리코더 시험을 잘 친 사람을 엄마와 아빠를 모시고 와 연주할 수 있다. 은희가 무언가를 잘해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항상 우중충하게 은희를 바라보던 분들이 활짝 웃을 수도 있다. 잘했다면서 꼭 껴안아줄지도 모른다. 그래, 부푸는 기대를 모두 다 내려놓고 생각해보자. 그래도 최소한 지금보다는 좋은 쪽으로 흐르지 않겠는가. 은희 자신에게도 큰 힘이 될 거다. 집에서 눈치 보고 꿈만 꾸던 은희가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

그러나 연습하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오빠에게 맞는다. 심부름도 해줬건만 너보다 내 공부가 중요하다는 재수 없는 말에 '재수 없다'라고 한 거, 고작 한마디 때문에. 누구도 은희의 오빠를 혼내지 않는다. 오히려 은희를 탓한다. 시끄럽다. 그만 울어라. 성가시게 들러붙은 실타래를 손으로 휘휘 젓다가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것처럼. '원숭이 같애.'

은희의 리코더는 오빠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낡았다. 침범벅이 된 낡은 리코더는 투박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답답한 소리가 난다. 한나의 리코더는 아주 곱고 맑은 소리가 난다. 꼭 그 애처럼. 리코더가 낡아서 불기 싫다는 은희에게 한나는 간단하게 말한다. 엄마한테 하나 사달라고 해. 순진한 말에 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리코더를 손에 들고 빠르게 집으로 가는 것뿐. 그리고 꿈동산을 부순다. 반짝이는 사람들도 뜯어낸다. 일순, 은희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은희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아빠가 신발끈을 묶어주던 하찮은 손길로.

시험 보는 날,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가장 낡은 리코더를 들고 투, 투, 투 분다. 박자도 소리도 엉망인 리코더.


은희의 세상은 앞으로 또 몇 번이나 무너졌다가 되살아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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