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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Jan 12. 2020

엘리자스는 모든 것을 형태로 만든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줄거리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화처럼, 영화는 한 남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인어공주가 연상되는 아주 깊고, 깊은 바닷속으로 안내한다. 누군가의 집, 방 안을 유영하듯 훑다가 한 지점에서 멈춘다. 기다란 소파 위에 몸을 옆으로 뉜 채로 잠든 어떤 사람. 내레이션의 표현에 따르면 '말 못 하는 공주', 엘리자스다.

 알람이 울린다. 바닷물이 걷히고, 모든 사물과 사람은 색을 갖는다. 밝은 채도는 아니다. 이끼처럼 탁한 초록의 방에 사는 엘리자스는 이와 비슷한 옷과 머리띠를 한다. 엘리자스의 하루는 단조롭고 규칙적이다. 길게 누워 자고, 안대를 벗고, 알람에 깨고, 자위를 하고, 달걀을 삶고, 아침을 옆집 할아버지에게 나눠주고, 버스를 타고, 자신의 옷가지를 창문에 대어 머리를 기대고, 청소부 일을 한다. 그의 생활은 의외로 조용하지 않다. 알람 소리, 물소리, 옆집 할아버지와 젤다의 말소리, 고양이 소리. 온갖 소리가 함께한다. 다만 그는 아무런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 정확히는 못한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홀로 입을 다문 채 살아가는 그는 자신과 아주 똑 닮은 '존재'를 만난다.




#엘리자스는 과 많은 관련이 있다

•강가에서 발견된 아이

 상사 스트릭랜드와의 면담에서 엘리자스가 세상에서 처음 발견된 곳이 강가 근처임이 드러난다. 그의 목에 있는 아가미 같은 상처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왜 생겼는지, 왜 그런 형태인지 아무도 모른다. 당연하다. 엘리자스에게는 자신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줄 사람이 없다.

 관람자들 대부분이 짐작하겠지만, 이 아가미는 '존재'와 엘리자스가 물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징표다. 메마른 육지에 살면서 쩍쩍 갈라진, 상처 같던 아가미는 물속에서 숨 쉬며 사라진다.


•아침 메뉴 : 삶은 달걀

 그의 아침은 늘 삶은 달걀이었다. 물에서 보글보글 끓는 달걀 서너 개. 달걀은 꽤 의미 있는 키워드다. 엘리자스가 '존재'에게 처음 알려준 인간의 언어이자 둘이 나눈 첫 대화이다.


•청소를 업으로 삼는다

 물을 매개로 둘은 만난다. 물탱크 같은 곳에 갇힌 '존재'를 인사와 스치듯 마주치고, 물걸레질을 하러 실험실에 들어선다. 이번엔 직접 서로를 눈에 담는다. '존재'는 족쇄에 묶여 있었지만 어쨌든.




#엘리자스는 모든 것을 형태로 만든다

•수화

 입으로 뱉는 발화는 형태가 없다. 입술과 성대와 혀의 움직임은 있어도 그것이 어떤 형태를 이루지는 못한다. 하지만 엘리자스는 수화, 즉 손으로 말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달리 손은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


•삶은 달걀

 앞서 짤막하게 언급한 달걀을 좀 더 깊이 이야기해보자. 달걀의 특성은 꽤 특별하다. 달걀은 형태가 없다. 껍질에 둘러싸여 액체를 붙잡고 있을 뿐. 껍질이 깨지면 고정적인 형태를 잃고 흩어진다. 그러나 '물'에 넣고 끓인 달걀은 '형태'가 생긴다. 껍질을 벗겨도 그 안의 형태가 온전히 보존된다. 엘리자스는 늘 달걀을 삶아 먹는다.


•'존재'

 이 두 가지를 모두 '존재'와 나눈다. 수화를 알려주고, 식사로 달걀을 준다. -물론 삶은 달걀 하나로 배가 차겠냐만은- 괴물, 전쟁에 써먹을 수 있는 도구 혹은 자산 따위로 취급받던 '존재'는 비로소 형태가 된다. 정체를 모르겠던 한 생물체가 인간의 언어와 소통, 감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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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I find You all around me.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It humbles my heart, For You are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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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신인가?

 총알을 맞고도 멀쩡한 '존재'를 보고 스트릭랜드가 말한다. '신'이었다고. 정말 '존재'는 신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인간에 가깝다.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이족보행을 하고, 지능이 있다. 이 '존재'를 인간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외관?

손가락이 썩어 들어가고 입이 찢어진 스트릭랜드는 인간 같은가? 고작 인간 같은 생김새를 가졌다는 이유로?

•말을 못 해서?

낼 수 있는 소리가 괴성과 쉭쉭 거리는 소리인 건 맞다. 그럼 엘리자스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일까? 인간 같은 생김새를 가졌는데도?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인간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다.

 엘리자스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는 '존재'의 치유능력 덕분에 상처가 낫는다. 심지어는 머리카락이 자라서 '존재'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의 눈에 번들거리던 욕망이 아직도 기억난다.


 과학자는 신기한 생물체를 파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엘리자스를 돕는다. 어느 나라가 승리하든, 조국이 어떻게 되든 관심 밖이다.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신기한 '존재'가 무사하기를 바란다. 엘리자스보다 맹목적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누구보다 큰 위험을 감수한 사람이다.


 젤다의 남편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실을 실토한다. 젤다가 협박받고 있을 땐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젤다가 끝내 입을 열지 않으면 다음에 죽을 사람은 자신임을 예상한다. 여태 나서지 않다가 그때서야 치졸하게 입을 연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동물'이라고 정의한 '자산'을 죽이려 한다. 자존심, 자부심, 자만심을 위해. 장군도 비슷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죽이라고 명령 내린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말은 내다 버린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버려지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숨 가쁘게 움직인다.


 이 욕망의 방향이 타인에게(도) 이로운 경우는 둘뿐이다. 젤다와 엘리자스. 젤다는 오로지 엘리자스를 위해 '존재'의 탈출을 돕고, 스트릭랜드가 찾아갈 것을 바로 알린다. 엘리자스는 자신과 같은,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러니까,

•때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서 할 수 있고, 때로는 무엇이든 가진 것이 있어서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던 인간에게 어떤 욕망의 대상 혹은 욕구가 생기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본인의 생 자체를 걸고 맞서는 사람을 이기려면 상대방도 자신의 생을 걸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엘리자스만이 그럴 수 있었다.

 '존재'가 인간과 다르게 생겼든, 물에만 있어야 하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일까. 자신과 같은 외로운 생명체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 엘리자스의 모든 발걸음이 '존재'에게로 향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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