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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10. 2021

나의 슬럼프에게

잘 가. 그동안 싫었어.


너에게 빠질 뻔했다.

다시 너에게 빠져 세상을 삶을, 나를 잊을 뻔했다.

아직도 내 곁에 앉아 나를 더듬는 너,

그래 봤자 너는 나를 못 잊어 속삭이는 너.

그래 난 너에게 빠지고 싶다.

컴퓨터를 덮고 너와 쾌락의 늪을, 조여 오는 숨을 힘겹게 토해내고 싶다.

세상 별 거 없어, 바둥댄다고 세상이 너를 알아줄 거 같아? 귀를 핥는다.


그래 난 너와 함께 그렇고 그런 세상을 살고 싶다.

그렇고 그런 하루를 맞이하고

그렇고 그런 인생을 끝내겠지.

너만 남은 그렇고 그런 나를

버리고 싶은 나를 용서조차 무의미한 그렇고 그런 나를 그렇고 그런 세상과 함께 보내겠지.


그렇고 그렇지 않았던 내 사랑들과

그렇고 그렇지 않았던 세상은

그렇고 그랬던 나의 소멸에 행복해할까?

신경도 쓰지 않는다. 느끼지도 못한다.

그렇고 그런 인생들은 그렇고 그런 세상은 너무 흔하니까.

바람조차 부딪힐 수 없는 허무니까.



난 바람을 느끼고 싶어

얼굴을 스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깊이를 깨닫고 싶어

내 손으로 만들고 사라지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싶어

이 주름 투성이 손이 곱게 펼쳐 놓은 단어들을 바라보고 싶어

안 된다고 하지 마.

난 그저 그렇다고 하지 마.

그저 그런 건 너뿐이야.

함부로 모든 것을 그저 그런 너의 시선 속에  넣고 즐기지 마.


난 사랑하고 싶어,

나를, 인생을, 세상을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소중한 순간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싶어.

이 순간의 소중함을 매일매일 깨닫고 손 사이사이 주름에 새겨 놓고 싶어.

찬란하게 빛나지 않아도 좋아.

내 숨결을 느끼고 세상을 가슴에 담을 수만 있다면.






넌 지금도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구나.

미안해, 알아. 너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것이 나라는 걸.

가라고 소리치면서 너를 붙잡고 있는 건 바로 나.

버림받을 거라는 두려움에 너라도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는 건

바로 나라는 걸... 알아.


그래 난 알아.

넌 나를 떠나지 않을 거고 난 또 네가 그리워지겠지.

다시 네 속에 빠져 허덕이겠지.


하지만... 난 알아.

그래도 세상의 끝은 아니라는 걸.

너와 함께 하는 나는 천성이 게을러 세상의 끝에도 쉽게 가지 못할 테니까.

네가 나와 함께 있고 싶은 곳도 그곳은 아닐 거야.

잠시 쉬었다 가라고 걱정해주는 거야.

우리가 모르는 어둠이 덮칠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거야.


그래 네 탓이 아니야.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야.

너도 세상의 일부, 나의 일부.

너는 나를 사람으로 살게 해 주는 두려움.

주저앉아 울고 싶을 때, 주저앉아 울라고 내 등을 쓰다듬어 주는 건 너니까.


단지 네가 아는 세상은 그렇고 그런 세상일 뿐.

알지도 못하는 다른 세상으로 어떻게 나를 데려가겠니.

단지 너는 나를 일으켜 세울 손이 없을 뿐.

주름진 손 가득 사연을 담고 싶지 않을 뿐.


그건 내가 할게.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 손으로 이야기를 새길게.

그러니까 이제 가.

그동안 너 때문에 힘들었어.


어쩔 수 없이 네 속에 빠질 때도 있겠지만 자주 나를 찾지는 말아줘.

난 너에게 그렇고 그런 나를 줄 수 없어.

그렇고 그런 나는 없으니까.


그동안 싫었어. 잘 가. 고맙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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