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할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일. 내 딴에 고도원 작가님의 "꿈 너머 꿈" 같은 꿈이다.
그전에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야 하겠지만...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수학 과외를 했었다. 중학교 여학생 4 명을 가르쳤는데 대학생 수입 치고는 꽤 많았던 것 같다. 돈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은 과외 수업을 이어갔는데 그중 한 여학생이 공부를 못했다. 그 당시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했고 커트라인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 점수에 한참을 못 미쳤다. 그래도 아이는 착해서 수업 한 번 빠지지 않고 잘 나왔다. 성적이 비슷하지 않은 아이 4 명을 같이 가르치려니 힘이 든다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학생의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아이, 고등학교 갈 수 있을까요?"
대학교 2학년밖에 안된 어린 학생에게 어머니의 질문은 너무 무거웠다. 그냥 솔직한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이번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이켜보니 그 어머니는 이미 답을 알고 계셨다. 단지 누군가에게라도 '할 수 있다' 한마디를 듣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어린 대학생에게라도.
그날,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내가 뭐라고 한 학생의 미래에 대해 그렇게 단정 지어버렸는지,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그 후에도 그 학생은 꼬박꼬박 수업에 나왔고 한마디 말도 없이 앉아 있다 돌아갔다.
얼마 후, 그 학생의 아버지가 대전으로 발령을 받았고 학생은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한 학생이 전학 간 학생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선생님 혜정이 대전 가서 잘 지낸대요. 성적도 쑥쑥 올라서 고등학교 합격했대요."
"잘 됐다. 정말 잘 됐다."
진심으로 기뻤다.
그리고 다짐했다. 남의 인생을 함부로 단정 짓지 말자. 특히 어린아이들의 인생을...
결혼 후,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자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학원 문을 두드렸다. 무슨 배짱이라고 하루 2 시간씩 일주일에 3번만 한다는 조건까지 내걸었지만 원장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물리학과를 나온 사람이 학원에 찾아온 경우가 없었나 보다. 다른 선생님들 시간까지 조정하면서 나는 중학교 1, 2학년 아이들 과학 수업을 맡게 되었다.
그때의 다짐은 단 한 가지. 아이들이 못하는 것을 보지 말고 잘하는 것을 보자. 이미 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한테 실컷 혼나고 있을 테니까. 나라도 잘하는 것을 칭찬해주자. 하지만 그 일은 1년을 채우지 못했다. 남편 직장 일로 그곳을 떠나야 했다. 수업 마지막 날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학원 문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음 수업 있잖아. 선생님들 기다리신다. 얼른 들어가."
내 말에도 아이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내 눈을 맞추고 작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급하게 건물 옆으로 몸을 돌리고 한참을 서서 눈물을 참아야 했다.
그리고 4년쯤 후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원장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너무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셨다. 과학선생님 부인이 급하게 쌍둥이를 낳게 되어서 수술을 하게 되셨다고. 과학선생님이 3주 정도 자리를 비울 것 같은데 도와줄 수 있겠냐고.
나도 공부를 안 한지 오래돼서 고등학생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나는 중1과 중 3 두 반을 맡게 되었다.
수업 첫날, 남학생 하나가 찾아왔다. 내가 4년 전에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야, 잘 있었어?"
"네, 선생님. 선생님 오셨다는 소리 듣고 인사드리러 왔어요."
어느새 청년이 되어버린 그 남학생은 맑은 눈을 내 눈에 맞추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저 과학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 물리 거의 만점 받아요."
부끄럽다는 듯 말을 마치고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남학생은 교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학원을 다니는 3주 동안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학생들 앞에 서서 언제나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맡게 된 두 반에서도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중학교 1학년 반이었다. 따로 모아놓았나 싶게 여학생들만 20명이 넘게 앉아 있었다. 여학생들만 20명!교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압도당했다. 수업 진도 나가려면 고생 좀 하겠다. 교실 문을 열었다. 40개가 넘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여유롭게 웃으며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그동안 나에 대한 '스캐닝'을 마쳤다.
'안녕~', 가볍게 내 소개를 하고 분필을 들었다.
"오늘 배울 게 F = ma.."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뒤통수가 시끄러워졌다.
"선생님 중학교 때 남자 친구 몇 명 사귀셨어요?"
몇 명?' 남자 친구 있었어요'도 아니고 몇 명?
요즘 애들이 다르긴 다르구나.
"선생님은 중학교 , 고등학교 때 남자 친구 없었는데? 대학교 때도."
"에이, 거짓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애들아, '라테는 말이야.' 중학교, 고등학교 때 남자 친구 사귀면 인생 포기하는 건 줄 알았단다. 남녀 7세 부동석인데 어떻게? 소꿉친구들도 중학교 들어가면 지나가다 마주쳐도 모른 척했어. 동네 아줌마들 눈이 얼마나 무서운데... 같은 소리는 꿀꺽 삼키고 화제를 돌렸다.
"너희들 지금 또래 남학생들 멋있니?"
"아유, 걔네들이요. 보고만 있어도 답답해요."
"근데 걔네들이 대학교 가면 멋있어진다."
"네엥? 말도 안 돼요."
"지금은 공부하느라 꼬질꼬질하지만 그런 애들이 나중에 더 멋있어."
아이들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그 애들이 멋있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어. 걔네들 주위에 있는 괜찮은 사람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지금 구박하면 안 돼. 잘 대해줘야 돼."
으흠, 그럴 수는 있겠군.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님이 왜 대학교 때도 남자 친구가 없었는지 알아? 대학교 들어가니까 남자들이 줄을 서는 거야. 너무 멋진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고르느라고 그랬어. 그 사람들 이야기하려면 한 시간 가지고는 택도 없으니까 일단 진도 좀 나가자."
열심히 떠들어댄 '뻥'이 들통날까 봐 급하게 몸을 돌렸다.
"에이, 선생님 얘기해주세요."
소리로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조용하다. 너무, 이상하게. 뒤 돌아보니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펜을 든 손에 힘을 꽉 준 채로. 제일 질문이 많았던 학생은 짝꿍의 책 쪽수를 살피더니 급하게 책을 펴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어, 그래. F = ma. 여기서 F는..."
아, 다음 시간에는 줄 섰던 남학생들을 어떻게 만들어 오나 고민을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음 시간에도 아이들은 수업에 집중했고 내 앞에 줄 섰던 아저씨들한테 관심이 없었다. 자기들 앞에 줄 설 남학생들 생각하느라. 두 시간짜리 수업을 한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그리고 중 3 수업. 매번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학원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0명 정도 되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책상에 기대어 자고 있다가 일어났다. 나를 보자 좀비처럼 허리만 세우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 아이들이 중 3이 맞나 싶었다. 어렵게 두 시간 수업을 끌고 가는 동안 한 여학생은 거울만 보고 있었다. 뻔히 보이지만 책으로 가린다고 가린 채.
다음 수업 시간 꼭 필요해서 숙제를 내줬는데 해 온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화가 났지만 화를 내봤자 소용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가슴에 새겼다.
"많이들 힘든가 보네. 선생님도 웬만하면 숙제 안 내줄게. 근데 내 준 건 꼭 필요한 거니까. 선생님 생각하면서 10분씩만 시간 내줄래?"
효과가 있을까 싶었는데 다음 시간에는 50% 이상이 그다음 시간에는 100%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숙제를 해왔다. 그래 봤자 11명이었지만. 그때 기분은 1100 명의 학생이 숙제를 다 해 온 것처럼 뿌듯했다.
처음으로 숙제 이야기를 했던 날이다. 첫날에 거울만 보고 있던 여학생이 이번엔 대 놓고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 못 집어넣어!" 소리를 내 가슴속으로 지르면서 학생 앞에 섰다.
"연경아, 너 거울 안 봐도 예뻐. 그 예쁜 얼굴 거울한테만 보여주지 말고 선생님한테도 좀 보여줄래?"
아이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 순간! 아이의 텅 빈 회색 눈동자 속으로 어디선가 떠돌던 영혼이 들어온 것처럼 눈동자가 검게 반짝였다. 너무 놀란 나는 수업 시간이란 것도 잊은 채 아이를 마주 봤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아이였다. 촉촉이 젖어들던 눈을 굴리며 아이는 거울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 이 아이는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일까? 있는 그대로 이렇게 예쁜 아인데? 나의 의문은 수업시간 내내 풀리지 않았다.
다음 시간부터 연경이는 맨 앞자리에 앉아 나를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내가 찡긋 윙크를 하면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얼마나 곱고 예쁘던지.
"선생님 숙제해 왔어요. 답도 맞춰봤는데 다 알 거 같아요."
연경이는 내가 교실에 들어서면 쪼르륵 달려와 앞에 서며 말했다. 내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면 다시 얼굴이 붉어져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나풀거리며 돌아서는 아이가 너무 예뻤고 너무 가녀려서 불안했다. 어느 날카로운 눈빛에, 우악스러운 손길에 저 나비 같은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팔랑팔랑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를 바랐다.
3주의 마지막 날 그 반 수업이 없어서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왔는데...
그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나에겐 꿈이 있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하는 꿈. 논술이나 독후감 같은 글들이 아니라 단 한 줄이라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쓰면서 너 참 이쁘구나, 넌 참 소중한 사람이란다 말해주고 싶다.
요즘 아이들은 더 무서워졌다던데. 더 무서워진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무서워졌는지, 그리고 왜 무서운지, 같이 글을 써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진짜 멋진 사람들이구나. 같이 쓰면서 울고 웃고 싶다. 우리 참 잘 살고 있구나, 매일매일 깨닫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