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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26. 2021

재능과 무기- 재능 편

예민서점 책 이야기 2

단언컨대 예민함은 재능이다


부디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 예민 점주 올림.


첫 번째 책 "예민한 게 아니라 섬세한 겁니다"를 읽을 때는 예민함이 재능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측인가? 예민한 것도 힘든데 재능이라니...


그런데 이상하다. 롤프 젤린의 "예민함이라는 무기"를 읽으면서  예민함이 재능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반복의 효과인가? 어느새 세뇌된 것일까?


글에서 논거 제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롤프 젤린은 먼저 심리학적 연구 결과로 예민한 사람이 전체 인구 중 15~ 20%에 달한다고 말한다. 예민한 사람들의 특징으로는 '신중함, 책임감, 양심, 겸손, 배려'를 든다.

그렇다. 예민하고 싶다고 모두 예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기질에 그 특징이 저렇게 좋은 것이라니, '재능'은 재능이구나 싶어졌다.


재능이라는 영어단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gift 란 단어가 좋다. 재능 이외에도 선물, 주어진 것이란 뜻으로도 번역되는 단어 GIFT. 선물이란 뜻이 있어서 좋았는데 거기에 재능이라니. 어릴 적 나도 신이 주신 선물, 재능을 가지고 싶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야 나의 예민함을 재능이라고 받아들이려니 여지까지 내가 원하던 선물이 아니라고 집어던지며 생떼를 부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그런 선물 하나쯤 있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는데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집 안에 고이 모셔놓고 있는 물건 하나. 그것을 준 사람이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거나 자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싫어도 더 잘 보이는 곳에 모셔놔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신께서 내려주신 선물이니 더더욱 어쩔 수 없다. 물론 어쩌겠다고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 예민함이란 신의 선물, 재능이 너무 크다. 내 속은 좁은데 나를 전부 차지할 만큼 크다. 5 평짜리 원룸에 3 미터 짜리 소파를 들여놓은 형국이다. 더 이상 식탁을 들여놓을 수도 침대를 놓을 수도 없다. 그 소파에서 먹고 자야 한다. 조금만 움직이려면 발을 걸어대고 세상으로 나가려면 산 하나를 넘어가는 것 같다.

예민함은 나에게 너무 과분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남보다 디테일한 감각을 가졌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2장의 부제는 '재능을 숨기게 하는 고정관념들'이다.

2장에서 작가는 예민한 아이들이 가정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겪고 어떻게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1단계 신체의 지각을 무시하기

2단계 자신의 관찰을 무시하기

3단계 다른 사람들의 관점으로 스스로를 지각하기.

마지막으로 자기중심을 잃은 사람들...

소제목만 보아도 사라지는 존재들이 느껴진다.


나는 몸이 싫었다. 사람은 왜 몸이 있어야 하고 그 몸을 지탱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가 끊임없이 고민했다. 음식을 삼키는 것도 싫었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싫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근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고 어떤 사람들은 '개똥철학하지 말아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 두 가지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엄마가 된 것이다. 첫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아이가 손 발이 제대로 있다는 것이,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정말 중요한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인간의 육체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2장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내가 엄마가 된 후의 시절이 그리고 현재가 번갈아 떠오르며 나를 짓눌러댔다. 내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구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 그렇게 몸을 싫어했던 원초적 고민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풀린 것이다.


 '1단계 신체의 지각을 무시하기'.

 "아이에게 부모의 이해와 공감은 너무나 중요하다. 예민한 아이에겐 그 어떤 말보다 섬세하게 느껴지는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부모의 이해와 공감은 아이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고, 잘하고 있다는 느낌,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부모의 이해와 공감이 부족하면 아이는 정말로 기가 죽는다. 든든한 지원군을 상실한 것 같은 느낌,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 스스로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예민한 지각이 부모의 이해와 공감을 방해할 수 있다니! 아이는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신체와 신체의 지각을 믿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자신의 신체 지각을 희생시키기 시작한다. 그 결과 신체를 굉장히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정신과 영혼에 딸린 귀찮은 부속품이자 생명활동을 진행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체의 저항을 억압하거나 극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예민함이라는 무기" 60쪽


그렇게 예민한 아이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신체를 무시하고 자신의 감각과 판단력을 무시하고 결국 자신의 중심을 잃게 된다. 내가 그랬다.


물론 예민한 아이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어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예민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자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난 그러지 못했다.


나의 예민한 감성을 지우고 남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몸을, 마음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분명히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열심히 살고 있는데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누군가는 자존감이란 이름으로 다시 멍에를 씌었다.


원망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예민한 아이였고 예민한 부모가 되어 예민한 아이도 키워보니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내가 무의식 중에 습득한 '무시하기'를, 사라져 버린 나의 중심을 깨달았다. 예민한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던 것이다. 어린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나를 지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들었나 보다.




이 책에서도 '예민함 자가 진단법'이 나오는데 나는 다시 '만점'이다. 만점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작가는 23 개 항목 중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면 예민한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는 글 뒤에 다음 글을 덧붙인다.


"현재 굉장한 스트레스 상황에 있지 않다면 말이다. 스트레스 상황에 있는 경우라면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도 예외적으로 예민한 사람처럼 반응할 수 있다."


 이 글을 돌려보면 예민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굉장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는 상황이 일상이라는 것이다. 일상 자체가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처럼 지속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다시 스트레스가 더해지면 예민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책의 앞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심리학에서 예민함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다 보니 심리치료사들은 예민한 사람들의 자극 지각 방식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이런 지각 방식으로 말미암은 눈에 보이는 결과들만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수줍음, 소심함, 우울, 스트레스 취약성, 만성 질병 등이 그 대상이다. 대부분의 경우 지각 방식은 전혀 논의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예민한 사람들이 부적합한 치료들을 받고서 오히려 치료의 부작용으로 우울증과 체념을 겪는 경우도 간혹 있다. - "예민함이라는 무기" 30쪽


이렇게 부작용이 큰 재능을 부여받았으니 예민한 사람들이 힘들 만도 하다. 그럼 그 재능의 부작용을 벗어나서 아니 어차피 겪어야 하는 부작용이라면 겪으면서라도 작가 말대로 예민함이라는 재능을 무기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무기는 잘 다뤄야 한다. 함부로 다루다가는 스스로를 찌를 수도 있다. 그러면 예민함이라는 재능을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롤프 젤린은 "3장 나는 나를 보호할 권리가 있습니다- 내부 자극에 대처하는 법, 4장 이기주의자와 이타주의자 사이 - 외부 자극에 대처하는 법, 5장 예민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러므로 예민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예민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 다만 예민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건설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그전에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이 너무 예민해서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HSP 연구소 Highly Sensitive Persons Insititute를 세우고 운영하고 있는 롤프 젤린의 말이다.


다음 주, "재능과 무기 - 무기 편"에서 예민함을 무기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갈까 한다.

미리 말하자면 쉽지는 않다.


*참고문헌

"예민함이라는 무기" - 롤프 젤린 지음. 유영미 옮김. 나무생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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