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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19. 2021

인간 지진계

예민 서점 점주 이야기 2



2016년 9월 12일 경주에 지진이 났다.

저녁 7시 44분. 포항에 살던 나는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바닥이 간질간질한 것 같더니 발목이 후들거렸다.

"지진이다."

외마디를 지르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다음에야 창문이 덜덜덜 떨리고 마루에 있던 남편과 둘째가 지진이다, 소리를 질렀다. 집이 천장까지 몸을 후덜덜덜~덜, 떤 후에 남편이 내가 달려왔고 나는 남편 손을 잡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마루에 앉아 있는데 속이 계속 메슥거렸다.

"이제 괜찮아진 거 같은데?"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냐, 아냐. 계속 흔들리고 있어'를 되뇌었다.


대구에 혼자 있는 큰 애가 걱정이 되었다. 남편이 전화해보니 친구들과 노래방에 있어서 못 느꼈단다. 거리가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지만 전화를 바꿔 달라고 했다.

"'첫째'야, 한 번 더 크게 올 거야.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나와야 해."

"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우리 엄마 걱정도 팔자다 싶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집이 흔들렸다. 본진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첫 번째 지진이 5.1, 두 번째 본진이 5.8이었다.

그때 화장실에 가 있던 남편이 크게 놀라 지진이다, 소리를 질렀다. 나는 흔들리는 몸에 마음을 맡긴 채 '내가 두 번째 올 거라고 했잖아'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놀란 둘째와 한 방에서 잤다. 위험하면 아이를 깨워 뛰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며칠 밤을 새웠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이번엔 1.8도, 음 이번엔 2.3 쯤 되려나, 진동을 느꼈고 다음 날 기상청 자료와 비교해 보았다. 며칠 후, 잠자리에 누웠는데 덜덜덜 다시 크게 방이 떨렸다. 이번엔 4.5 넘겠다 싶었는데 찾아보니 4.6이었다. 두려움을 푸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는데 기상청에서 2도 이하의 여진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은 후로는 두려움 감소 효과도 사라졌다. 나는 느꼈는데 확인할 방법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경주 지진이 나던 날,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우리 집은 1층 단독주택이었다)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나왔다고 했다. 둘째 친구들은 자기 학교 운동장에서 이 야밤에 너를 만날 줄은 몰랐다며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단다. 사람들은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둘째와 같은 반 친구들 중 몇은 경주에서 유학 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학생들이 놀라서 경주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한동안 불통이어서 마음을 졸였다고 했다. 통화가 된 뒤에 괜찮다며 딸을 안심시키던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씀하셨단다.

"마루에서 티브이 보다가 엉덩이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경주 지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그리고 1년 후, 2017년.

둘째가 고3이었다. 수능 삼일 전, 그러니까 2017년 11월 14일. 둘째를 태우러 학교에 갔다. 수업이 끝나기 전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창 밖으로 그날따라 유난히도 맑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털구름이 거대하게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흔하던 까치들은 구름 새들에게 길을 내준 것처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나뭇잎사귀들은 무엇에 놀란 것처럼 제 잎을 떨구지도 못한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날카로운 칼날처럼 정적 하나가 스쳐갔다. 그리고 툭 터지는 생각 하나!

"지진 나면 어떡하지?"

말로 뱉었으면 '퇴퇴퇴'라도 할 텐데. 불쑥 든 생각은 어떻게 지우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둘째가 차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왔어?" 반갑게 웃으며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수능 전날, 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오후 2시 29분.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서울 출장을 마치고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남편과의 통화를 마친 후였다. 예비 소집이 끝나면 둘째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전화를 기다리며 화장실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구구구구구구",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돌로 만들어진 거인이 땅을 구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무슨 소리지? 저 정도 소리면 건물 해체라도 하나? 하는데 온 몸이 흔들거렸다. 거울을 보고 있던 나는 내 머리가 2미터를 넘게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경주 지진 때는 '아, 지진이다'라는 생각이 끝나기 전에 흔들림이 멈췄는데 포항 지진은 '지진이구나' 생각을 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온몸이 흔들거렸다. 제정신이 돌아왔는데도 흔들림이 멈추지 않자 모르고 당하는 것과는 다른 공포가 몰려왔다. 나는 아이 걱정에 주저앉지도 못하고 마당으로 뛰어나와 전화를 했다.


불통. 불통.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큰 애였다.

"엄마, 괜찮아요? 왜 전화가..."

"어, 괜찮아. '둘째' 전화받아야 하니까 끊자."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괜찮아. '둘째' 전화받아야 하니까 끊어요."


다시 영원 같은 기다림. 전화가 울리고 이번에는 둘째였다. 울먹이고 있었다.

"그래, 갈게. 밖에서 기다려."

학교 강당까지는 차로 5분. 미리 가 있을까 하다 놀라 뛰쳐나온 아이들한테 해가 될까 싶어 참고 있었다. 강당 앞에 도착하니 선생님들이 귀가 지도를 하고 있었다. 둘째를 태우고 나서 돌아볼 틈도 없이 안부 전화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는 사람들의 걱정들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정신 좀 차리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둘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남편이 집에 올 때까지 그대로 시간은 멈춰버렸다. 밥을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에 수능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힘들었다. 다시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니. 하지만 그때 수능이 연기되지 않았다면 다음 날 여진으로 큰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지진도 몸으로 느껴졌다.

 

수능이 연기되었다고 포항 학생들을 하는 글들이 한동안 SNS에 올라왔다고 하던데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포항 학생들이 제일 큰 피해자였다. 다른 곳의 학생들은 일주일이란 시간이 더 생겼을지 모르지만 포항 학생들은 일주일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져 버렸다면 차라리 좋았겠다. 일주일 내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여진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고 낮에도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수능날, 포항은 아슬아슬하게 조용했다. 부모들은 시험장 근처에서 소리 죽인 채 수능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발 지진만 일어나지 말아라, 바라고 바랐다.


수능이 끝나고 한참 후에 둘째가 전해준 예비 소집일 당시 상황.

학교 강당에 모인 학생들이 수능 주의사항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천천히 천장을 바라봤다. 구구구구,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흔들리더니 천장에서 먼지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학생들의 비명소리.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학생들은 출구를 향해 허둥거렸고 넘어지고 우는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강당 밖으로 나와서도 멈추지 않는 지진에 학생들은 주저앉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어느새 둘째는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었고 큰 애는 지진 관련 일을 하고 있다.

큰 애와 지진 이야기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지진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가 농담 한마디를 했다.

"엄마를 지진계로 써 주면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 텐데."

뼛속까지 이과인 큰 애가 한마디 한다.

"엄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흐흐흐, 알았어."

글로는 써도 되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떠올랐는지 큰 애가 묻는다.

"엄마, 그런데 경주 지진 때, 첫 번째가 전진이고 더 큰 본진이 올 줄 어떻게 아셨어요?"

"엉? 그냥. 느낌적으로 느껴졌어."

큰 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한다.

"나 엄마가 가끔 무서워요."

"흐흐흐, 나도 내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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