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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Dec 08. 2021

돌아봐야 할 시간

글쓰기의 어딘가에서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만 3개월을 넘긴 시간 쓰기만 하면 된다고 달려왔다.

그 덕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 글이 정리가 안될 때도 일단은 쓰자며 손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도 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자꾸 돌아보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대로 쓰기만 하면 안 된다고 이대로 못 보낸다고.

식당 문을 나서는데 계산하고 가라고 누가 자꾸 붙잡는 것 같다.

조금은 억울해지기도 한다. 이미 다 계산했는데 언제 했냐며 머릿속이 달려든다.

교정도 보고 수정도 했다. 스스로 정해놓은 마감시간도 잘 지켰고 주제도 소재도 열심히 선별했다. 다른 작가님들 글도 열심히 보고 배웠다.

그러면 계산을 제대로 안 한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내 속을 토해내는데만 전전긍긍하고 있다. 사춘기 학생의 감정 기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되겠지 하면서 글을 쓴다는 데만 집중하고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전에는 그냥 쓰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찜찜할 때가 많다. 이것도 나의 글쓰기가 커가는 과정이자 성장통이란 것은  알겠는데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클 수 있다.

그 다른 것을 알 때까지 머릿속은 복잡할 것 같다.

언젠가 유레카 하는 날이 올까? 오겠지? 두려워진다.




늦은 밤 '그 다른 것'들을 찾아 헤맸다. 다 찾지는 못했지만 나름 성과는 있었다.


예민한 글쓰기

나의 글쓰기 목표를 되돌아보았다. 첫째는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다. 나에게 솔직해지고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지는 글쓰기다.

브런치 작가가 된 지 3개월의 시간이 넘게 흐르면서 브런치의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소중한 독자가 생기고 내 글을 매번 읽어주는 작가분들도 생겼다. 거기에 응원을 담은 라이킷까지. 그 덕에 한 편 한 편 글을 완성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독자수에 라이킷에 연연하고 있었다. 난 그렇지 않아, 안 그래 다짐을 었는데 계속 머릿속에서 들린다.

"얼레리 꼴레리~ 소려는요, 독자수 늘리고 라이킷 받고 싶어서 글 쓴데요."

그래, 내가 어느새 그러려고 들었구나. 그래서 자꾸 내 속의 아이가 딴지를 걸었구나.

예민해서 다행이다. 그 소리를 들었고 받아들였다. 다시 나 자신을 찾아가고 바로 세우는 글쓰기의 목표를 되새겼다. 항상 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만의 예민한 글쓰기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논리적 글쓰기

물리가 좋아서 물리학과에 갔던 덕분에 이과적인 뇌 구조에 익숙하다. 내 뇌구조가 이과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거기다가 남편까지 이공대인 덕분에 이과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하루는 큰 딸이 물었다.

"엄마는 아무리 봐도 전형적인 문관데 어떻게 물리학과에 가셨어요."

"고3 때 제일 재미있었던 게 물리였거든. 물리를 하고 글을 쓰고 싶었어."

"아, 엄마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복합형 융합 인재'였네요."

"복합형 융합 인재?"

"이과와 문과를 아우르는 시대의 선두주자."

"딸아, 왠지 그건 엄마가 딸에게 해줘야 하는 소리 같구나."


그렇게 '복합형 융합인재'인 내 귀에 가장 거슬리는 소리가 있다. 사회학자나 인문학자들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친구들 중 한 친구의 남편이 대학교 행정실장인데 이과 쪽 교수들보다 문과 쪽 교수들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자주 한단다. 이과 계열 교수들은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수긍을 하는데 문과 계열 교수들은 소리만 지르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 괜히 내 목소리가 커졌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데 소리 지르고 안하무인인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학 쪽 사람들이래."

(개인적인 견해를 옮겼을 뿐입니다. 합리적으로 사시는 대다수의 사회학 쪽 분들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가 대화 소재가 글쓰기로 넘어갔다.

대학 시절 교양으로 들었던 김남조 시인의 강의였다. 기말고사 시험 문제가 '시란 무엇인가?'였는데 친구들은 첫째, 둘째, 셋째로 끝날 이야기를 시험지 뒷장까지 메우던 문과 학생들을 궁금해했었다.

그날이 떠올랐다. 우리 과 학생들은 십 분 만에 하나둘 자리를 떴고 내가 답안지를 내고 나오면서도 시간이 모자라 손이 급해지고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문과 계열이었다.

"뭐가 그렇게 쓸 게 많아?"

30분 넘게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야, 뒷장도 꽉꽉 채우고 한 장 더 달라는 사람도 있었어."

내 말에 친구들은 기겁을 했다. 친구들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은 그 글을 읽어야 하는 조교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친구들 눈에 그런 글은 단지 주저리주저리로 느껴졌을 것이다. 논리가 부족한 한풀이 글인 것이다.


부끄럽게도 내가 그런 글을 쓰고 있었다. 일단은 내 속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의식의 흐름'만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속을 정리하면서도 글은 논리적으로 쓸 수 있다. 알면서도 감정에 치인다고 무시하고 있었다.


적확한 글쓰기

적재적소에 필요한 글 한 줄은 온몸을 짜릿하게 한다. 바로 '촌철살인'인데,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적확한 소재를 선택하고 비유를 해야 한다. 대작가들에게서도 자주 보기 힘든 글쓰기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손을 놓고 있었다. 적확한 비유와 예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사춘기 문학소녀의 글쓰기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니 내 머릿속이 나에게 한심하다 하고 있었다.

아직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확한 비유에만 연연하다 보면 글 한 편을 완성하기도 전에 글쓰기에 물릴 수도 있다. 하지만 노력해야 한다.

중재 방안을 모색했다. 하루에 한 가지만이라도 찾아보자. 찾지 못하더라도 한 번은 고민해보자.


느긋한 글쓰기

보이는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것은 큰 기쁨이자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재미없다고 읽다가 나가버리면 어떡하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너무 뺐나?

글을 쓰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은 마음을 재촉한다.

빨리 써. 질질 끌지 말고. 야, 그러고 우물쭈물거리면 누가 네 글을 끝까지 읽겠니?


그런 말들이 글을 정리해주기도 하지만 글을 각박하게도 만든다. 나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게 하고 글쓰기를 숨 가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내 글들이 툭툭 던지는 돌멩이 같을 때가 많았다.


글쓰기의 묘미는 무엇인가? 시간을 자신에게 허락하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더 이상 고속 열차를 따라잡겠다고 뛰지 말고 내 걸음으로 살포시 걸어보자. 흐르는 바람 한 줄기 느껴보자. 편안한 마음 한줄기 글에 담아 보자.




지난밤, '다른 뭔가'를 찾아 헤매던 시간이 헛수고가 아닌 것 같아 기쁘다. 정리한 것들은 시간을 가지고 매일 돌아보면서 연습해야 하는 과정이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돌아봐야 할 것들이 생기겠지만 작은 것이라도  보는 눈이 생긴 내가 기특하다.

'나라는 작가 만들기'란 수레가 세상을 향해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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