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엄마들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세계 명작 전집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으면 나는 온 세상이 그 안에 꽂혀 있는 것 같았다. 도서관이란 것도 흔치 않았고 국립 도서관이란 것을 안 것도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좋았던 것은 책들로 가득 찬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그렇게 우물 안 개구리 '국민학생'은 세계 명작이란 말이 좋아서 그 앞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어머니도 그곳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면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셨으니 내 것이라고 인정받는 공간과 시간이 생겨서 더 좋았다. 어릴 적 나는 그 앞에 앉아 그 책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커갔다.
사람들을 만나면 책 이야기가 반 이상이었다. 친구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고 싶었고 어른들 앞에서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책에서 읽은 거라고 하면 꼼짝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고소해서였다. 특히 어색한 관계에서 책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러다가 "어, 나도 그 책 읽었는데 좋더라"하면 드디어 진정한 친구를 만났다고 좋아했다.
그렇게 어른이란 표피를 쓰고 늙어가기 시작했는데 친한 친구가 한마디 했다. 아마 그날도 새로 읽은 책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던 것 같다.
"'소려'야, 책 많이 읽는다고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 특히 널 보면 흐흐흐. 그래서 하는 말인데, 책 좀 그만 봐라."
35년 지기가 한 소리고 맞는 말 같기도 한데 기분이 나빴다. 왜 책을 보라 마라, 별 걸 다 상관이야. 책을 읽으라는 말은 많이 들었고 많이 했어도 책 읽지 말라는 소리는 생뚱맞았다. 그래도 친한 친구가 나를 위해 한 소리니 책을 편식하고 있지 않았나 돌아보고 오히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펴 들었다.
여러 가지 집안 일로 힘들 때였다. 매일 눈물바람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중학교 선생님인 막내 시누이가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도시로 나를 끌어냈다. 현재의 힘든 일상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왜 맨날 결론은 그때로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이래서 주위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나 봐요."
"그때의 아픔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나 보네."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곳으로 말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도 서재에서 책 한 권 뽑아 들고 있으면 행복했어요."
그러자 시누이가 내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책 속에 숨은 거네."
무의식이 출렁거렸다. 환했던 카페가 어두워지고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검은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책 속에 파묻혀 울고 있는 아이가 언뜻 보였다.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가의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후 한동안 나는 책을 끊었다. 어쩌면 책은 나에게 마약 같은 건지도 몰랐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찾아 헤매던 마약. 손에 책 한 권이 들려있지 않으면 금단 증상처럼 마음이 불안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렇게 책을 읽는데도 깨우치지 못하는 내가 이해가 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손에서 책을 치우고 명상을 했다. 잡다한 생각들이 밀려가고 어둠이 몰려오면 그 아이가 가끔 고개를 내밀었다. 그 아이 주위로 책들이 높게 담을 쌓고 있었다.
책으로 만들어진 담 한 편을 허물었다. 놀란 아이가 뒤로 물러섰지만 다시 책을 쌓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안녕", 인사를 했다. 아이가 나를 노려보았다. 햇빛을 보지 못한 얼굴은 하얗다 못해 귀신같았다.
"미안해, 너를 이곳에 가둬서."
사과를 하며 입술을 깨물자 아이가 나를 비웃었다. 아이의 얼굴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나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아이가 이죽거렸다.
"네 잘못이 아냐." 내가 힘들게 입을 뗐다.
"알아." 아이가 다시 이죽거렸다.
"하지만 나를 여기 가둬버린 건 너잖아."
여기까지였다. 항상 여기서 멈춰버렸다. 나는 책 속에 숨은 아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내가 돌아서면 아이는 땅바닥을 구르는 책을 모아다가 다시 벽을 쌓았다.
"네가 책 없이 살 수 있나 두고 보자." 이를 갈면서.
역시 그 아이 말이 맞았다. 책을 끊은 동안 나는 더욱 피폐해졌다. 내 속에 파묻히지 않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현실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속은 텅텅 비어갔고 무의식 속의 아이는 배 고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속을 파먹어댔다.
책은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터전이었다. 지난 세월, 책을 안 읽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내가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살아온 내가 대견하기는 하다.
그런데 내 속의 아이를 너무 모른 척했다. 내 마음을 돌아보지 않고 책 속의 이야기들만 집어삼켰다. 그러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나보다 더 힘든데도 잘 사는 사람들 많다고 아픈 아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아이를 치료해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아이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주지 않은 채. 아이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은 채...
"괜찮아, 별 거 아닌 일 가지고 징징대지 마."
눈을 부라리며 옆에 앉혀놓고 책만 읽어주고 있었다.
미안해. 진심을 담아 사과를 했다. 아이가 다시 나를 노려본다. 몸도 마음도 크지 못하고 얼굴만 쭈글쭈글해진 아이가.
미안해. 아이가 돌아선다. 하지만 무의식 속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미안해. 이번엔 내가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미안해, 계속 적어 내려갔다. 한참을...
"아, 또 그 이야기야. 다른 것 좀 써봐." 어느 날, 아이가 다가와 잔소리를 한다.
"다른 이야기?"
내가 놀라 돌아보자 아이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날 이야기..."
아이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본다. 아이의 눈은 맑다. 너무 맑아서 서럽다.
"아직은..."
내 말에 '그럴 줄 알았어'하고 차갑게 돌아설 줄 알았는데 아이가 눈을 떨구며 말한다.
"그럼, 언젠가는?"
"으 응. 언젠가는..."
우리 둘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아픔이 세상의 잣대로 보면 흔한 일이란 걸 알만큼 알 나이가 되었는데도 나는 아프다. 더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나니 아프다는 소리도 못한다. 서로 나 아파, 아파하고 소리 지르는 세상에서 내 소리 하나 더해도 들리지 않을 테고 들린다고 아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이제 내 속의 아이와 토론하고 책 이야기를 한다. 같이 글을 쓰며 같이 울고 웃는다. 세상의 잣대로 별 거 아닌 아픔이 내 잣대로도 별 거 아닌 날을 기약하면서. 아픔을 아픔으로 떠나보낼 수 있는 날을 기약하면서.
"어,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 내 속의 아이를 보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