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 살던 시절, 남편이 출근을 하고 아이들이 등교를 하면 usb 메모리 칩 하나 들고 포항공대 도서관으로 향했다. 직원 가족이라 주어진 대학교 도서관 출입 카드는 내게 보물 상자를 여는 열쇠 같은 것이었다. 도서관 출입 카드를 찍고 계단을 올라서면 원통형 건물의 천장 끝에 하늘이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서면 주위로 빙 돌아가며 앉아 있는 책들이 나를 쳐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만 기다려.
책들에게 눈인사만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메모리 칩을 꽂았다. 그리고 다시 '백수' 만들기에 나섰다.
'백수', 백 편의 수필 만들기다.
글쓰기 책만 읽다가 내린 결론이 있으니 쓰자. 쓰자를 되새기며 시작한 나만 아는 나만의 프로젝트였다. 숫자 100부터 시작해서 99, 98 적어가면서 그날그날 떠오르는 생각들과 겪었던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100이라는 숫자가 좋았다. 언젠가는 숫자 00을 지우고 '1' 자를 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미 제목에서 말했듯이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한 번은 70대에서 멈췄고 한 번은 80대에서, 제일 오래 간 것이 50대였던 것 같은데 그 세 개의 메모리 칩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니, 책상 서랍을 뒤져보면 버리지도 못하고 꼭꼭 숨겨놓은, 알면서 알지 못하는 장소에 놓여있는 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님들은 모두 아시겠지만 열심히 썼다고 생각한 글들을 교정 볼 때의 민망함이라니. 거기에 정말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자괴감을 더 하면 메모리칩에 연결된 컴퓨터를 내려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은 왜 이 모양인가? 나는 역시 글을 쓰면 안 되는 사람인가? 그러다가 난 사람이긴 한 걸까, 하는 생각까지 흘러들어 가기 시작하면 나의 백수는 갈가리 찢겨버려지곤 했다.
그렇다면 교정을 보지 말고 일단 백수를 완성하자. 그렇게 또 시작, 시작을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들을 모으면 '백수'를 넘어서 '천수', '만수'를 달성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글을 다 모아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은 또한 알 것이다.
교정하지 않은 글들은 정답을 맞혀보지 않은 답안지와 같다. 틀린 문제 틀리고 또 틀리면서 발전 없이 문제만 풀어대면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라도 좋은 점을 찾는다면 문제 유형은 알았다는 것 정도?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지도 못한 채 같은 문제집만 붙잡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나의 백수 만들기의 꿈은 매번 좌절되었다.
돌고 도는 쳇바퀴에서 뛰어내린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교정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전에 만들다 만 백수들은 철저히 외면해버렸다. 10 년 전, 20 년 전 글들이니 다시 보아도 누구세요? 못 알아볼 것 같았다.
지금도 내 속에 넘치는 것들이 많으니 얘네들부터 달래야겠다. 일단 눈에 보이는 글부터 교정을 해나갔다. 당장 브런치에 발행하기로 마음먹었던 글부터.
1차 교정, 생각만 해도 삭신이 쑤신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한숨이 나온다. 내 글이 대부분 3분에서 5분 정도니 그 시간만 참자. 나 스스로를 속이고 속아준다. 교정에 들어간다. 1차 교정은 최소 2 시간에서 3 시간이 걸린다. '아, 이러고도 내가 글을 쓰겠다고 했다니'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돌을 던지면서 1차 교정을 마친다. 그렇게 2차, 3차 교정을 마치고 나면 돌 던지는 횟수가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래도 괜찮은데 싶을 때가 생긴다. 물론 내 기준에서.
스스로 발행을 약속한 시간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글들도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고치지 못한 글들은 현재의 내 능력 밖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발행을 한다. 그것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발행하지 않았다면 내 글 중에서 발행된 것은 한 편도 없었을 것이다.
한 편 발행하고 다른 작가님들 글을 읽는다. 보고 배우고. 아, 저 번에 쓴 글에서 부족한 게 무엇이구나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 것이 될 때까지 머릿속에서 발효시킨다. 뭉글뭉글 피어올라 나만의 액기스가 되었을 때 글 속에 한 방울 떨어뜨린다. 뭐가 부족한데 싶었지만 '뭐가 뭔지 몰랐던 것'을 무의식 중에 깨닫게 되고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채워간다.
이제 다시 '백 수 만들기'를 꿈꾼다. 언젠가는 진정한 천 수, 만 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의 향기를 지닌 글이,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읽고 행복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는 버려두었던 '백수'들을 깨워 세상으로 내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내 '백 수'들에게 당당해지고 싶다.
백 수의 꿈을 이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