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터가 처음 나왔을 때 신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팩스를 보내듯 데이터 조작으로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잠시 내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었던 때가 떠올라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들의 쾌거에 놀라면서 상상을 더해봤다. 내가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물건이 만들어지면 어떨까? '사과' 하면 먹을 수 있는 사과가 생기고 '과자' 하면 과자가 생기는 상상을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그런 게 이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널리 상용화되고 소지 가능한...
바로 우리 몸이었다.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 몸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시각적 형태뿐만이 아니라 사과의 향기, 씹을 때의 감촉, 퍼져 나오는 즙까지를 모두 생성해낼 수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사과를 실제로 보고 먹어 본 사람만이 그 감각들을 재생해낼 수 있다. 바다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푸른 바다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경험한 자만이 5D 프린터를 작동시킬 수 있다. 요즘이야 사진이 있다지만 형태를 넘어서 파도소리와 짭조름한 바다내음은 설명해도 몸속에서 생성해낼 수 없다.
그렇게 몸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파악한다. 사과라는 단어 자체는 ㅅ과 ㄱ, 그리고 두 개의 모음 ㅏ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과를 경험한 사람들은 사과라는 과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만들어낸다. 사과의 형태, 감촉, 향기, 맛, 씹을 때의 소리, 즙이 생성된다. 사람은 3D 프린터를 넘어서서 5D 프린터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 경험이 중요하다. 말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입에 욕을 달고 다니던 아이들이 있었다. 제법 인기 있는 아이들이 욕을 멋있는 것처럼 말끝에 붙이니 반 아이들 입에 욕이 번지기 시작했다. 야단을 치다가 얌전한 아이들 입에서도 욕이 추임새처럼 나오기 시작하자 선생님이 특단의 조치를 내리셨다. 국어사전을 하나씩 들고 오라는 것이었다. 회초리가 아니라 국어사전? 다음 날, 아이들은 궁금해하면서 국어사전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욕을 할 때마다 국어사전을 손에 들고 벌을 세울 거라고 한 아이가 말했다. 바둑판처럼 큰 국어사전을 들고 온 아이가 놀라 두 손의 국어사전을 쳐다봤다. 작은 국어사전을 가지고 온 아이는 한 손으로 국어사전을 들고 빙글빙글, 친구들 앞에서 춤을 췄다.
수업 시간, 선생님은 몇몇 아이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욕을 칠판에 쓰셨다.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욕을 잘하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그 아이들은 고개를 들고 싱긋 웃으며 친구들의 눈을 자랑스럽게 느꼈다. 선생님은 한숨을 쉬시고는 이제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라고 하셨다.
잠시 후, 아이들의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전을 보다가 정말 '안 본 눈'을 찾고 싶었다. 그 욕은 초등학생들이 감당하기 힘든 상상 이상의 욕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흉한 것은 다 붙여다 놓은 것 같았다. 아이들은 아까와는 다른 얼굴로 욕을 하고 다니던 아이들을 쳐다봤다. 그 아이들은 얼굴이 새까맣게 변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후 다시는 그런 욕을, 적어도 우리 반에서는 듣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말의 대부분을 의식하지 못하고 뱉는다. '이 말은 꼭 해야지' 하면서 하는 말이 하루에 몇 마디나 될까? 몸은 무의식적으로 말을 한다. 말이 바로 그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가 하는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머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바로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받아들인 환경을 3D 프린터보다 정교한 몸과 생각이 영혼으로 프린팅해서 다시 몸을 만들고 생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중의 가장 큰 재료가 바로 말이다. 그래서 말이 사람을 길들인다.
뜨거운 햇살 아래 새 한 마리가 잔소리를 하고 있다. '씻비씨비 씻비'. 지나가던 까마귀가 '까악', 귀를 막는다. 소리들은 산속으로 스며들어 누군가의 경험이 되고 추억이 될 것이다. 다시 어느 날,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난 오늘의 이 풍경을 떠올리겠지. 가뭄에 지쳐서 제 수분을 태우는 풀 냄새까지. 탁자 위 붉은 장미들이 타자 치는 내 손을 따라 몸을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