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촉'이 좋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노래를 생활 전반에서 실천한다. 행복한 예감도 자주 맞히는 편이다. 주위 사람들의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매거진 예민서점 '신내림' https://brunch.co.kr/@hyec777/107)
난 내 '촉'이 싫고 무섭다. 거부하고 일부러 둔하게 깎아내며 살지만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중국 베이징에 살 때였다. 남편은 주재원 생활의 스트레스를 등산으로 해소했다. 남편은 동호회 같은 모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교통편과 언어, 안전 등을 고려해 산악회에 들어갔다. 나는 자금성 뒷산에 올라가는 것도 싫어하던 터라 남편은 당시 초등학교 5학년, 1학년이었던 두 딸을 번갈아 가며 산에 데려가곤 했다. 산악회에서 남편의 별명은 '아빠와 크레파스'였다. 두 크레파스 딸들은 어려도 산을 잘 탔지만 중국 산은 험하고 높은 산이 많았다. 산행 일정이 정해지면 남편은 둘 중 누구를 데려갈지, 혼자 갈지를 정했다.
그날은 남편 혼자 등산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이들과 등산을 갈 때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유부초밥이라도 싸주었지만 남편 혼자 갈 때는 전날 해 놓은 반찬으로 남편이 도시락을 준비했다. 그날은 베이징에서 차로만 5시간여를 이동한 후 시작되는 산행이라 남편은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설핏 깼을 때다. 침대 발 밑에 한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소름 돋는 웃음을 띤 채 눈을 반짝이며 나를 노려 보았다. 나는 가위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꺽꺽댔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다녀올게."
그때 안방 문이 열렸다.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생각했다.
'남편이 예전처럼 머리맡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할 거야, 푹 쉬고 있어요. 따뜻한 손길이 닿으면 악몽은 사라질 거야.'
그런데 남편은 내 옆으로 오지도 않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아까 꿈속의 할아버지가 서 있었던 그 자리에 서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다녀올게."
남편의 미소와 그 할아버지의 웃음이 겹쳤다. 나는 놀라서 뛰어오르듯 일어나 남편을 붙잡았다.
"안돼. 가지 마."
눈물은 폭포수처럼 흘렀고 내가 그렇게 힘이 셌나 싶을 정도로 남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찰나, 뭔가에 홀렸던 남편이 내 모습에 놀라 다시 내 남편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남편은 울고 소리치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안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갈게."
내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남편이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남편을 움켜쥐었고 남편이 나를 달래며 말했다.
"산악회 사람들한테 안 간다고 전화해 줘야지. 안 그러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남편은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내 옆에 누웠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남편의 손을 쥐었고 우리 둘은 늦잠을 잤다.
그날 아침,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했다. 등산하기 좋은 날인데... 미안한 마음에 남편을 돌아보았다. 등산 갔을 줄 알았던 아빠가 집에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두 딸에게 둘러싸여 남편은 햇살처럼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우리 가족은 산악회 회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왕징의 한 음식점에서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분들을 만나 아이들을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화 내용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보험이 어떻고 수술비가 어디까지 지원되고... 옆에 앉은 산악회원 분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전에 사고가 있었어요. 큰 바위 하나가 굴러 떨어져서 회원 분 손 위로 떨어졌거든요. 많이 다치셔서 수술까지 하셨는데 아직도 안 좋아요. 그나마 머리가 아니라 손이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편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놀란 내 눈을 보더니 손사래까지 치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