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민서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려 Dec 24. 2021

말이 사람을 길들인다


말이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울고 웃었다. 말 한마디를 씹고 씹었다.

"왜 저 사람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예민한 나는 말 한마디에 때로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때로는 깊은 위로를 받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따지는 나한테 지쳐서 멀어져 간 친구들도 많았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모르던 어린아이의 성급한 마음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보고 돌아보다 어린아이가 세월에서 걷어올린 사실 하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생각 없이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비수가 되어 꽂혀 있는 말을 내뱉은 사람은 기억조차 못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제목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 내용과 그림은 그대로 떠오르는 동화가 있다.

새엄마가 의붓딸에게 깊은 산속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라고 했다. 아이는 힘들게 우물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하는데 아이는 힘들었지만 물을 떠서 할머니에게 건넨다. 모두가 아는 대로 그 할머니는 마법사였고 아이에게 선물을 한다. 말을 할 때마다 금은보화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물을. 그 모습을 본 새엄마가 샘이 나서 자신의 딸을 우물로 보낸다. 성격이 나쁜 아이는 마법사를 함부로 대하고 아이는 저주를 받는다. 말을 할 때마다 두꺼비 지네 등 온갖 흉한 것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저주를...

 

그 동화를 읽고 어린 나는 입 속을 한참 들여다보았었다. 벌레가 있으면 어떡하지? 보석이 있어도 문제다, 찔리면 엄청 아플 텐데. 그런 상상을 하며 혼자 웃던 때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내 입에서 튀어나가는 두꺼비를 보았다. 내 입에서 기어 나오는 지네를 보았다. 그리고 내 입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수십 마리의 벌레들을 느꼈다. 아직 수습도 떼지 못한 기자생활에 염증을 느낄 때였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눈으로는 다른 소리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한테 지친다고 변명을 할  때였다. 누군가를 욕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였다.

카페 화장실에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 주위로 내가 뱉은 말들이 뛰어다니고 기어 다니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동화 속 아이가 되어 산속을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물은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의붓딸도 친 딸도 모두 나였다는 것을. 마법사가 내 속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을...

나도 어느새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착각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하는 말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럴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는 말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의지대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말들 중에서 정말 내 생각대로 하고 있는 말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내가 무의식 중에 뱉은 말은 다시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와 어느새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버릇없이 군다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 사람을 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에게서 제일 싫어하던 행동과 말이 나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이지만 다시 그 행동과 말은 살아나서 내게 다가온다. 행동은 보이니 금방 인식할 수 있지만 말은 문제다. 우습게 여기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말만큼 무서운 건 없다. 보이지 않게 조용히 스며들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은 사람을 길들인다. 내가 하는 말에, 상대가 하는 말에 길들여진다.


중국어를 배울 때였다.

"백 문장을 들으면 열 문장을 말할 수 있고 한 문장을 글로 쓸 수 있다."

중국어 선생님의 운율을 탄 중국어 문장이 아름답게 들려왔다.

백 문장이 내 속으로 들어와야지 나의 입에서 열 문장으로 태어나고 내 손에서 글 한 줄이 될 수 있구나.

외국어를 배우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긴데 갑자기 섬뜩해졌다. 그렇다면 그 백 문장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내가 되는 거구나 내 속에서 소화가 되고 제대로 내 것이 되어야 밖으로 나갈 수가 있구나. 그렇다면 듣는 말이란 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한마디 한마디가 내 속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사람을 길들이는구나. 무서워졌다.


내 속에 있는 말들을 정리해야겠다, 나를 길들이고 있는 말들과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들을 정리하고 내 나름대로 옳고 그른 것을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에 길들여지고 싶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달라지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나를 위협하는 것들을 걷어내고 옳은 것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위하는 척 치장하고 다니는 번지르르한 말들을 걷어내고 싶었다.

나를 길들이는 말들에 대해서 쓰고 싶어졌다. 가끔은 내 말들을 길들이고 싶어졌다.


맑은 말에 퐁당 빠져서 맑은 세상을 보고 싶다. 맑은 숨을 뱉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