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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Dec 26. 2021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없다

말이 사람을 길들인다

푸른 밤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쉬고 나의 존재를 느낀다. 그렇게 내가 있다. 푸른 나를 느낀다.

- 예민 점주 소려


2년 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살아온 친구들이라 사는 방식과 수준들이 비슷비슷하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이유다.

그런데 그중 한 친구가 힘들어 보였다. 너무 말라서 가는 목에서 목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갑상선 항진 아니냐고 묻자 역류성 식도염이 심해서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고 다.

"스트레스구나."

내 말에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많이 힘들어한다고 했다. 끝내 자기가 힘들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보다 늦게 애를 낳아서 지금 친구의 아들은 고1이다. 어릴 때부터 자주 보아온 아이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예민하다. 먼저 자식을 둘 키워봤다고 건방지게 사춘기 아들을 둔 친구를 걱정했었는데 막상 문제가 닥치니 해 줄 말이 없었다.


내 아픔을 다 아는 친구지만 제 아픔은 말하지 않는 친구다. 다행히 부부 사이도 좋고 남편이 다정한 사람이라 아이와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그럴까?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아온 아이지만 남의 자식도 내 자식도 언제나 어려운 사람들이라 말을 아껴야 했다. 그런데 참다가 터지고 말았다. 친구 아들의 상담사가 한 말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낮대."

친구가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읊조렸다.

내 속에서 불끈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자존감이 낮다고?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나도 한동안 그 단어의 팬이었다. 자신감, 자만심과 대비되면서 그리고 잘못 쓰이고 있는 자존심과 분리되면서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단어 같았다. 그런데 원대한 인류애를 꿈꾸며 세워진 나라가 사람들 욕심에 부서지는 것처럼 허물어져 가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사람들을 억압하는 단어로 변질되고 있었다.

 

"야, 'A' 이제 16살이야. 그런 애한테 자존감이 낮다니? 그 상담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높은 자존감으로 무장을 하고 태어났다니? 사춘기 아이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자신이 원하는 거랑 세상의 잣대가 달라서 갈등 좀 한다고 자존감 낮다고 애를 처박아?"

씩씩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친구가 씽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동안 친구들은 내 말을 들어야 했다.


"왜 아이들한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 걸까? 부모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게 과연 자존감이 높은 걸까? 물론 공부가 좋아서 하는 아이들도 있고 부모가 원하는 길과 자신이 원하는 길이 딱 들어맞아서 행복한 아이들도 있을 거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고민을 해야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정리하고 일어날 수 있는지 고민할 시간을 가져야지. 그 시간에 공부 좀 안 한다고 자존감이 낮은 거니?"


내 친구 부부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아이의 갈등이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벗어나 세상으로 한걸음 내디디려는데 세상이 부모들과 다르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 세상에서는 귀하게 여겨지지 않고 돈이 되지도 않는다...

아이의 마음을 모르니, 아니 안다고 해도 내 섣부른 생각은 여기서 멈춰야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내뱉는 "자존감이 낮다"라는 말은 여전히 화가 난다.

"나 요즘 학교 가는 게 친구들 만나는 게 힘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다니는데 네가 자존감이 낮아서 그래."

앞 뒤가 없다. 자존감이 낮다는 말로 모든 평가가 끝나고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존감이란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왜 이 단어는 족쇄가 되어 안 그래도 힘든 사람들을 더 괴롭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롤프 젤린의 책 "나는 단호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해답을 찾았다. 그 책도 글의 편의성을 위해 책의 대부분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란 문장으로 진행되지만 롤프 젤린이 하고 싶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서는 거부감이 줄었다. 하지만 문장을 고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아진 사람' 혹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사람'으로.


낮다 높다의 기준은 어디일까? 사람들은 무슨 기준으로 낮다 높다를 정하는 것일까?

다시 '자존감이 낮다'라는 문장으로 돌아가 그 소리를 들으면 나는 꽉 막힌 벽이 생각난다. 저 지하 세계 어딘가 골방에 갇혀 점점 나를 내리누르는 자존감의 벽에 숨이 막히는 것 같다. 한동안 갇혀 지내봤다.

그런데 말을 바꿔봤다.

"너 요즘 자존감이 낮아졌구나."

벽이 사라지고 누군가 손을 내민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나 보네."

누군가 상처를 살펴주고 보듬어 준다.

나는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다. 낮아졌으니 높아지면 되고 상처를 입었으니 치료를 하면 된다. 다만 이번에는 세상의 눈이 아닌 나의 마음대로 높아지고 상처에 약을 바를 것이다.


말장난하지 말라고 하실 분들은 더 이상 내 글을 읽지 않아도 좋다. 어린 시절 그 소리를 들으며 내 인생을 장난처럼 휘두르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다. 말장난과 진심이 담긴 말 정도는 구분할 나이가 되었다.

적어도 나는 나에게 더 이상 '자존감이 낮아서 그래'라고 말하지 않는다.

힘들 때면 말한다.

"자존감이 낮아졌네."

그리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다시 높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속상해지면 말한다.

"자존감이 상처를 입었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사람 말에 그렇게 충격이 컸어? 내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 만큼 그 사람이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야?'

중요한 사람이라면 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해보고 고칠 방법을 찾아보면 된다. 그 사람이 잘못 말한 거면 다시 이야기해본다. 중요한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잘못을 하니까.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물론 신경 쓸 것도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 자존감은 존재한다.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운다.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것만 제대로 하면 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는 정도? 내 손 발 멀쩡하니 내가 해야 한다. 내가 밥 주고 내가 뒤치다꺼리해야 한다. 자존감은 남이 대신 세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높여야 하는 것이 자존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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