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복화술을 하는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분명 말을 했다. 어린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어른은 '왜 그래?' 물었다.
"무슨 말 하셨어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린 나는 의아했다. 단 둘이 있었는데 나는 이 어른이 하는 말이 들렸다. 그런데 이 어른은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곁에 있었든가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어야 하는데?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의문은 풀렸다. 난 그 사람이 눈으로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한 아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의문점이 생겼다.
왜 사람들은 입으로 하는 말과 눈으로 하는 말이 다를까?
분명 입으로는 칭찬을 하는데 눈으로는 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욕이 들려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후천적으로 알게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려서부터 나는 몸으로 알고 있었다. 마음으로 느껴졌다.
어른들 모임에 끌려갔다가 서로 말로만 좋은 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복화술'로 나쁜 소리가 들려오면 화를 내거나 딴짓을 했다.
대놓고 "에이,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잖아요." 했다가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고 돌아오는 길 내내 부모님한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 후부터 나는 사람들 눈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특히 어른들 눈을...
보통 사람들이 예민한 사람들을 불편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리고 나면 어찌 편하겠는가.
그 후로 나는 눈으로 듣는 말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착각이야, 또 생각이 앞서갔어."
중얼거리며 내가 느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세뇌시켰다.
타인의 감정을 짐작하지 말고 사람이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라는 어떤 자기 계발서의 글을 몸소 실천하려고 애쓰며 살았다.하지만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둔해졌고 아파왔다.
대학 4학년 어느 날, 모든 것이, 아픔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내 감정이란 것은 사라진 지 오래고 마음이란 것은 나를 떠나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풍선 줄을 붙잡고 다니는 것처럼 마음을 마지막 실 한 줄에 매달아 다니고 있었다. 가끔 마음이 멀리 날아가버리지는 않았나 지친 눈으로 확인하고는 했었다.
하루는 눈을 떴는데 그냥 눈물이 흘러넘쳤다. 울컥 생각들이쏟아져 나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인가?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을 조리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난 그냥 나대로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잘 보이려고 애쓰면서 내가 아닌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이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내가 내가 싫다면 이제 그만 떠날게."
그날 나는 내 마음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나는 나 없으면 안 된다고. 나도 그냥 나로 살고 싶다고. 그렇게 나는 나를 붙잡고 한동안 울었다.
그렇게 붙잡아 놓고도 내 마음한테 살갑게 굴지는 못했다.
"또 시작이냐. 작작해라."
남보다 더 못되게 구박을 하고 패대기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내 마음을 모른 척 무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지금도 나는 사람들이 눈으로 하는 말이 들린다. 모임에 늦게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방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날 그 모임에 대한 분위기 파악이 끝난다. 오늘은 분위기가 좋은데. 오늘 또 저 사람 쓸데없는 소리 해서 다른 사람들 기분 상하게 했구나.
다행히도 나이가 들면서 어릴 적보다는 예민도가 낮아져서 예측이 빗나갈 때가 많아졌다. 눈으로 하는 말도 욕으로만 듣지 않고 요즘 저 사람이 힘든 일이 많다더니 지금 마음이 안 좋구나 이해하게도 됐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눈빛을 보내면 '아이고 저 인간 또 시작이다' 무시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눈으로 하는 칭찬과 공감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마음과 눈으로 대답한다.
"고마워요."
그리고 힘든 삶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사람한테는...
그런 사람들은 눈빛이 끊임없이 흔들린다. 두려움에 말도 잃고 마음 한 가닥이 간신히 눈동자에 매달려 있다. 차라리 엉엉 울면 좋을 텐데, 그럴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한테 힘내라는 말은 정말 욕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라는 뻔한 소리는 안 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