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이런 사장님 없겠죠?
사춘기 때 들은 이야기다.
아침부터 사장님 심기가 좋지 않았다. 직원 하나가 물었다.
"사장님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그 O이 아침부터 바가지를 긁어대잖아."
'공간능력(?)'이 뛰어난 직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 O 때문에 사장님이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 이야기를 전해주던 아저씨가 그 직원을 탓하면서 비웃던 것이 기억난다. 그 아저씨는 사장님이 아무리 자기 아내를 '그 O'이라고 했더라도 직원은 '사모님'이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 나는 그건 사장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랑 아침부터 싸웠어도 직원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직원한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어떤 험한 소리를 할까? 소름이 끼쳤다. 그런 남편이랑 사는 여자는 얼마나 힘들까? 어린 나는 한동안 꿈속에서까지 '그 O'이 참 불쌍했다.
나이가 들고 나서야 사장님과 직원 둘 다 아니, 사모님이 되지 못한 그 아줌마까지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죽하면 사장님이 그렇게까지 말했겠는가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을 하려다가 역시 결론은 그래도 그러면 안된다였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면 주위 사람들을 만나보면 안다. 말로 전달된 느낌은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다가 다시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법이다.
첫 애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편 회사 직원들과 밥을 먹을 일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날 처음 본 신입 직원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도 눈을 거두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다 싶어 대놓고 물어봤다.
"왜요?"
말을 걸어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직원이 입을 열었다.
"저는 과장님이 하도 무서워하시길래 사모님이 엄청 무서우신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전혀 아닌데요."
회식 중에도 전화 한 통화에 달려 나가는 남편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제가 애 낳고 많이 아파서 그래요. 그게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직원은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는지 나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그날 밤 고민에 빠졌다. 남편은 내가 그렇게 무서운 걸까? 내가 말한 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다음 날 아침에 물었더니 남편 대답은 명쾌했다.
"당연히 무섭지. 이 세상에서 난 당신이 제일 무서운데, 몰랐어요?"
그리고 더 과거로 돌아가 본다.
결혼을 얼마 앞두고 신부 화장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친한 직원 하나가 미용하는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럴까 하고 있는데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날 일이 생겼다. 직원의 친구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구석구석 뜯어보길래 웃으며 물었다.
"왜요?"
"하도 친구가 피부가 안 좋으시다고 해서 얼마나 나쁘길래 그러나 했는데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신데요."
옆에 있던 직원이 민망해서 소리를 질렀다.
"야, 내가 언제? 생긴 거에 비해서 나쁘다고 그랬지."
나중에 따지지는 않았다. 직원이 나를 걱정했다는 것을 직원 친구의 눈빛에서 보았으니까. 그리고 이미 내 피부가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거나 '썸'이란 걸 타고 계신 분이라면 그 사람의 친구나 가족을 만나보시길.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면 안다."
대대로 내려오는 명언을 돌려본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친구나 가족이 나를 대하는 것을 봐라."
아무리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이더라도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함부로 굴지 않는다. 장난을 치더라도 기분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띄워주는 장난을 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혹시라도 친구가 과한 장난을 치려한다면 썸 타는 사람이 먼저 화를 낼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것이 친구와 가족, 그리고 연인에 대한 당연한 예의다.
그 당연한 것을 말로 '까먹으려' 드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 사장님의 그 직원이 바른 사람이라서 '사모님 때문에 사장님이 힘드셨겠네요'라고 대꾸를 했다 치자. 그렇더라도 그 직원에게 그 사장님의 '그 O'은 '사모님'이 될 수 없다. 그 직원이 아무리 생각이 바른 사람이더라도, 이해심이 넘치는 사람이더라도 사장님 부부를 존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생....
말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말 한마디는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도 하고 가족을 향하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가슴의 칼날 하나 꺼내서 울타리로 쓸 나무를 잘라와야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울타리를 만들고 예쁜 전등 하나 달아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