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일어나서 뭐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고 싶은가?
도서 "예민함 내려놓기" 194쪽 희망 연습의 한 구절이다.
내 대답은? 별로 궁금하지 않으실 거 같아 넘어가고.
그럼 당신은?
생각이란 것이 눈에 보여서 쉽게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좋은 거, 나쁜 거 분리하고 정말 귀한 생각들은 유리병에 넣어놓고 자꾸 보았으면 좋겠다고. 재활용도 힘든 생각들은 소각장으로 보내서 활활 태워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메모를 했다. 나쁜 생각들을 적어 북북 찢어버리기도 했고 좋은 생각들은 곱게 궁서체로 적어 형광펜으로 덧칠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나쁜 생각들은 없어지지 않았고 간직하고 싶었던 생각들은 어디에 적어 두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뭉둥 그려진 생각들은 마음 한 군데서 썩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말했다.
"그게 나야!"
그런데 난 나를 바로 알고 있었을까?
사람들은 심리학이란 것을 만들었고 어느새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아 헤맨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쉽게 자신의 마음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고 그냥 숨을 곳이 없어서 심리학으로 뛰어들어 온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심리학이 모두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다시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이니?"
도서 "예민함 내려놓기"는 세세하게 예민함의 성향을 분리, 분석한다. 다른 도서에서는 주로 한 카테고리로 묶어서 점수를 매기던 예민 지수를 8가지의 섹션으로 분리했다. 그걸 다시 수치화해서 문제의 원인을 구체화시킨다. 책을 읽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수치가 낯설었지만 예민함을 객관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를 엿본 기회가 되었다.
혹시 자신이 예민하다고 느끼시는 분이라면 이 책의 2장 "당신은 몇 퍼센트 예민하십니까"의 예민함 체크리스트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체크리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예민함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어렴풋이 보인다.
예민함 체크리스트다. 각각 4, 5 개의 질문이 주어진다.
1. 감각 과민
2. 순화 저항
3. 애착 불안
4. 마음의 상처
5. 신체화
6. 망상 경향
7. 회피 경향
8. 저등록
이 중 1번 감각 과민과 2번 순화 저항은 신경학적 예민함, 즉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고
3번 애착 불안과 4번 마음의 상처는 심리사회적 예민함으로 후천적인 환경 요인으로 심해진 예민함이다.
5번 신체화와 6번 망상 경향은 병리적 예민함으로 분리하고 있다. 작가는 병리적 예민함이 심각한 경우 즉시 전문의와 상담하라고 당부한다.
7번 회피 경향과 8번 저등록은 예민한 사람들의 여러 증상들 중 하나인데 '저등록'은 나에게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왔다.
'저등록'. 영어로는 low registration으로 한국어로도 전문적인 심리학 용어가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직역한 느낌이 든다. 일단 책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저등록은 "자신이 예민한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다른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다. -167쪽"
딱 내 이야기였다. 나는 무슨 걱정거리가 생기면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못한다. 하다못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잔다. 예민해서 제일 힘든 부분 중 하나인데 나 나름대로는 집중력이 높아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기도 했다. 문제는 일상생활이 힘들다는 것이다. 생각에 빠져 설거지를 하다가 칼날을 맨 손으로 닦기도 했고 뻔히 보이는 물건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걱정거리의 심각성에 따라 그런 증상들도 그 정도가 심해진다. 예민하다면서 나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는데 그 원인을 알고 나니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를 풀어낸 것 같았다. '저등록'이란 증상을 파악하고 나니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소려'야 너는 걱정에 빠져서 현실이 보이지 않는구나. 하지만 지금 너는 음식을 하고 있고 칼질을 해야 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은 칼질에 집중해야 다치지 않을 거야."
(혹시 이 사람 뭐야 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해해주시라. 저는 지금 예민함이란 녀석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극단적인 성향도 마찬가지다.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극단적 성향은 예민한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모 아니면 도', '검은색 흰색, 둘 다 아니면 모두 회색'하던 지난날의 내 단순한 사고방식이 생각났다. 완벽할 수 없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겠다던 나의 나약한 마음도 떠올랐다. 살면서 친구들한테 '왜 그렇게 극단적이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예민함의 한 경향이라니! 왠지 마음이 놓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다양한 "예민해지는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삶의 적응도, 삶의 고달픔, 행복도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나간다. 작가는 그중 애착관계에 큰 비중을 두는데 애착 불안이 예민함과 행복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애착 유형은 크게 '불안형', '회피형', 양쪽 모두 가진 '공포 회피형'으로 나뉜다. 예민함 체크리스트 중 3번 애착 불안이 4개 이상인 경우가 불안형, 7번 회피 경향이 4개 이상인 경우가 회피형으로 분리되는데 양 극단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사실은 불안정한 애착에 기인한 것이다.
회피형은 친밀한 관계나 신체접촉을 싫어하고 가능하면 정서적 유대감을 갖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억압한다. 이런 유형은 겉으로는 단단하고 차분해 보여서 사회적 자립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밖에 믿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문제 없는 것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단다.
반대로 불안형은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한다. 회피형과 비슷하게 어린 시절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사랑받았던 경험이 있는 경우 불안형으로 나타난다. 불안형은 예전에 누렸던 애정을 무의식적으로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쓴다.
행복도가 가장 낮고 삶의 고달픔 지수가 가장 높은 유형이 바로 불안형이었다. 애착 불안을 겪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세상의 끝을 걷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예민함의 다양한 문제들을 돌아보고 그 해결책으로 자신만의 안전 기지를 만들라고 제시한다. 안전 기지는 모든 문제들을 초월해 예민함을 줄여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안전 기지란 것이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돌고 돌아 결론은 사람과의 관계다. 아무리 힘들어도 날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한 사람마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부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작가는 '안전 기지'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세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당신에게 가장 안전 기지가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둘째 당신은 그 사람에게 안전 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가.
셋째, 당신의 안전 기지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인가. -226쪽."
작가는 말한다. "애착은 함께 만드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관계는 그 끝이 분명하다.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회피형인지 불안형인지 파악해보고 서로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사랑한다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전 기지가 되어주지 않는 사람, 안전 기지가 되어 줄 수 없는 사람과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두라고 작가는 당부한다. 아프더라도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는 것이 가장 큰 용기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더라도...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점을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짚어준다.
"안전 기지가 되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은 어떡하지?"
작가의 대답은 명쾌하다.
내가 나의 안전 기지가 되어야 한다.
"애착의 본질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로봇이냐 인간이냐 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할 때 상대해주느냐 아니냐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생각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키워 자신의 행동을 긍정할 때, 주위와의 관계도 안정된다. 그리고 당신 속의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마음도 점차 외부 세계와 균형을 이룰 것이다.
- 230쪽"
심리학도 사람이 만든 것이다. 융의 영혼의 지도처럼 마음의 지도를 그려놓으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가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학문이 그 속도를 쫓아갈 수 있을까 싶다. 시도 때도 없이 지어지기도 하고 사라지는 건물들이 있고 새로 생기는 길들이 있다. 그런 것까지 그릴 엄두는 내지 못하더라도 큰 윤곽이라도 그리려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갇혀 버려서는 안 된다. 심리학이라는 학문보다는 내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려 놓은 지도는 참고만 삼아야 할 것이다. 내 마음은 내가 찾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저 멀리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기적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예민함 내려놓기"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어크로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