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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Mar 30. 2022

그건 너!

말이 사람을 길들인다


우습게도 한동안 ‘감정이입’과 ‘공감’이란 단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감정이입을 해야 공감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전혀 다른 두 단어를 순서의 차이라고 버릇처럼 우기고 있었다.

모두들 웃고 있는 농담을 나 혼자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안절부절거렸다. 단어들이 내 주위에서 빈정거렸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잠시 벗어나서 변명을 해야겠다. 내게 단어는 형태를 지닌 생명체다. 웃다,라고 쓰면 그 단어가 나를 보고 웃는다. 슬프다,라고 쓰면 뿌연 하늘 아래 ‘슬프다’가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남들이 무심하게 입으로 흘리는 이야기에 맞으면 정말 아프다, 몸까지 아프다.


‘감정이입’과 ‘공감’이란 단어는 한동안 두리뭉실하게 엉켜 다니고 있었다. 다가왔다가 퉁, 튕겨나가곤 했다. 그 단어들도 아프고 나도 아팠다. 온전히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탓이었다. 한참 동안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나서야 두 단어가 쪼개졌다. 각자의 다리로 서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두 단어는 주어가 달랐다. ‘감정이입’의 주어는 ‘나’였고 ‘공감’의 주어는 ‘너’였다.

‘감정이입’은 너를 계기로 나를 생각하는 것이었고 ‘공감’은 너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울고 있다. 엄마가 다가와 묻는다. 아이가 친구와 싸웠다고 한다.

한 엄마는 말한다. “다 그러면서 사는 거야. 엄마도 그랬어.”

한 엄마는 말한다. “우리 아기, 속상했겠다. 많이 힘들지?”


두 엄마의 말속 주어는 다르다. 한 엄마의 주어는 엄마 자신이고 한 엄마의 주어는 아이다. 부끄럽게도 난 모든 주어가 ‘나’인 사람이었다. 습관이 무섭다고 머리로는 애쓰는데 항상 입은 ‘나는 말이야’를 먼저 흘리고 있었다.


큰 애에게 큰맘 먹고 사과를 한 적이 있었다.

“너 어렸을 적에 엄마가 미숙해서 상처 준 일이 많았지. 미안해.”

큰 애의 대답이 명언이었다.

“엄마가 기껏해야 제 나이였잖아요. 그 나이에 뭘 아셨겠어요?”

음~, 칭찬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위로인지, 타박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2인실이었는데 같은 방을 쓰던 사람은 갓 결혼한 ‘새댁’이었다. 자궁외 임신으로 수술을 하고 아이까지 잃었으니 몸도 마음도 아팠다. 눈이 마주칠 때면 쓸쓸한 미소를 지었던 고운 새댁이었다. 조용한 오후, 침대에 누워 각자 힘든 몸을 다독이고 있을 때였다. 여자 세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노크 한 번 없이 문은 벌컥 열렸고 ‘여기 맞네’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때 이른 딸기 한 박스를 펼치더니 그 딸기가 다 없어지고 나서도 그들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댁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그냥 미소 지었다. 그날 제일 힘든 사람은 그 새댁이었다. 새벽 응급 수술을 마친 날 꼬박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으니까.

시누이들로 보이는 세 명은 번갈아 가며 자신이 애 낳았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연분만의 아픔과 제왕절개 후의 아픔을 저울질하며 딸기를 집어삼켰다. 나는 두 아픔을 다 아는 처지라 쫓아가 빠른 판결을 내려줄까 고민하다가 참았다. 유산도 겪어봤지만 자궁외 임신으로 수술을 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새댁은 새벽에 꿰맨 배를 움켜쥐고 그들의 말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병원은 지금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말 한마디로 세상이 달라 보이는 곳이다.

“내가 알지. 알지. 정말 힘들어.”

‘공감’이란 단어를 깔고 앉아 떠드는 소리는 잔인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없고 자신의 넋두리만이 있었다. 아픈 사람을 깔고 앉아 한풀이 춤을 추고 있었다.




‘지금’ 힘든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리고 ‘지금’ 내가 힘들 때 나를 위로해주겠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공감’은 정말 어렵다. 내 아픔을 이겨내야 하고 타인의 아픔에 무너져서도 안된다. 나로 바로 서서 아픈 사람을 진심으로 안아줘야 한다.  

감정이입은 쉽다. 감정 속으로 들어가 내 한풀이를 위로인 양 떠들면 된다.

나는 아직도 ‘감정이입’과 ‘공감’ 사이를 비틀거린다. 그 둘이 번갈아 가며 손을 잡아주지만 공감은 자주 손을 내밀지 않는다.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진정 어린 공감 한마디가 부러운 이유다. 열심히 받아 적고 몸으로 깨닫고 싶은 이유다.


'나이가 어려' 미숙한 나는 되새기곤 한다. 지금 내 말이 이 사람에게 필요한 말일까? 나 편하자고 하는 소리는 아닐까?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면 입을 닫자. 귀를 열자. 머리를 닫고 마음을 열어 이 사람을 안아주자. 공감의 진정한 주어를 찾자.

지금 아픈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기쁜 사람은 누구인가?

아픈 사람을 마주하고 가슴이 따끔거리고 입이 간질거리면 되새긴다. 지금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그건 바로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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