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다가 책을 접었다. 분명히 다른 소재들이 가득한데 작가가 하는 소리가 똑같았다.
내가 이해를 못 하나 싶어서 시들 한 편 한 편의 주제, 제재, 소재를 구분해보았다. 여전히 모두 다른 것들을 가지고 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가의 문체겠지만 좋은 소리도 자꾸 들으면 질리고 같은 분위기의 시를 자꾸 읽으면 졸리다.
반대로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소재로 사람을 팍 잡아끄는 시들도 있다. 어떻게 이 소재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정신이 번쩍 깨이는 시들도 있다. 멋있고 시원하기도 한데 어느 순간 말장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속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너무 앞서가는 거 아냐? 사람들 흥미를 끌려고 너무 애를 쓰는 거 같은데."
수필도 마찬가지다. 따뜻하긴 한데 지루한 글들이 있고 생각은 신선한데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글들이 있다.
쓰는 작가 마음과 읽는 독자 마음이 가지각색이니 내가 독자로서 느끼는 것은 탓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쓸 때는 다른 문제다.
내 글은 어떨까? 좋은 말이라고 똑같은 소리를 중얼대고 있는 건 아닐까? 최첨단 유행을 따라가겠다고 색 바랜 빨간 치마를 입고 뛰어다니고 있는 건 아닐까?
도자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흙의 중심 잡기다.
우선 토련해 놓은 흙 덩어리를 물레에 쿵 올려놓고 물레를 살짝 돌리면서 왼손 검지로 흙의 테두리를 눌러 흙을 고정시킨다. 이제 물레를 멈추고 두 손바닥으로 흙을 탕탕 쳐준다. 그 반동으로 물레를 돌려가며 흙을 원뿔 모양으로 만들어준다. 물레와 흙이 완전히 달라붙으면 페달을 밟아 다시 물레를 돌린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흙의 중심잡기다.
왼손 팔꿈치는 왼쪽 무릎 위에 올리고 오른쪽 팔꿈치는 배에 기대고 양손으로 흙을 움켜쥔다. 왼손을 계란을 쥐듯 오므려서 팔꿈치 쪽 손바닥과 손가락에 힘을 준다. 오른손은 손바닥에 힘을 준 채 물레 속도에 맞춰 흙을 잡아 올린다.
이것이 올리기다. 물레의 속도가 느려서도 빨라서도 안된다. 적당한 물레 속도에 흙을 올리는 속도를 잘 맞춰줘야 흙이 올라간다.
그리고 내리기. 내리기는 흙의 꼭대기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감싸 쥐고 기울여준다. 왼손은 올리기와 마찬가지로 올라가면서 힘을 주는데 올리기와 달리 왼 손 혼자 힘을 줘야 하니 힘이 더 든다.
올리기와 내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는데 물레와 손이 박자가 안 맞으면 흙은 움직이지 않고 버틴다. 또 힘들다고 손에 힘을 주는 대신 손으로 밀어버리면 흙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흙이 중심을 잃은 것이다.
그 모습은 똬리를 튼 뱀이나 화재에 녹아내린 플라스틱 덩어리 같다. 계속 뒤틀리면 몸을 흔들다가 어디로 튕겨 나갈지도 모른다.
올리기와 내리기를 하는 이유는 흙이 잘 섞여서 전체가 고르고 부드러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흙만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을 골고루 묻혀 올리기 내리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내 손은 흙과 하나가 된다. 흙은 내 손에서 녹아나고 흘러내리는 흙의 눈물에 내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서서히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흙의 중심잡기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형태를 만들기도 힘들지만 형태를 아무리 예쁘게 만들어도 말리거나 구울 때 깨져버려요."
도예공방 선생님 말씀을 귀에 담고 마음에 담아 다시 흙의 중심을 잡는다.
힘을 쥐어 올리고 내리다가 두 손이 마주치면 힘을 뺀다. 흙이 내 손 안에서 원심력을 이용해 제 중심을 잡을 때까지 1, 2초 기다려 주었다가 손을 뗀다.
내 손가락 자국을 그대로 그린 채 흔들리지 않고 물레 위를 도는 흙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중심을 잘 잡으면 이렇게 아름답구나."
글도 다르지 않다. 올곧게 자기중심을 잡은 글들은 아름답다. 친한 친구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하듯 따뜻하다. 편안한 단어로 핵심을 뚫고 커다란 울림을 준다.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준다. 믿어준다.
그런 글들을 보면 작가의 삶이 궁금해지고 마음이 보고 싶어 진다.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이런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들쑥날쑥 제 마음대로 뻗어가는 '작가의 서랍' 속 내 글들을 보고 있자니 심난하다.
다시 두 손에 힘을 주고 올리기를 한다. 그리고 내리기.
"마음아, 섞여라. 네 아픔을, 네 기쁨을 날 것으로 버려두지 말고 이제 나와 하나가 되자.
아픔, 기쁨 하며 혼자 튀지 말고 손가락의 흔적을 담아 높이 올라가자. 이젠 다시, 하늘 탓 그만하고 내려가자."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아, 어느 순간 손끝으로 느껴지는 글의 마음들. 그 녀석들이 속삭인다.
"이렇게 중심을 잡다 보면 예쁜 글 한 점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인생 글' 한 장 찍어낼 거야."
어느 날엔간 오겠지? 글의 중심을 잡는 날이?
흙의 중심
잡고 싶다
글의 중심
꼭 잡고 싶다
마음의 중심
정말 잡고 싶다
- 소려의 못된 시 '중심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