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물레를 배우기로 한 날이었다. 손물레는 둥근 주물판 밑에 회전판이 있어서 손으로 주물판을 돌려가며 그릇을 만든다. 느리고 힘이 많이 들어간다.
컵을 만들기로 했다. 주물판 위에 흙을 올려놓았다. 전기물레를 돌릴 때 쓰던 백자토 대신 분청토였다.
'색깔부터 마음에 안 들어.' 입을 쑥 내밀었다.
우선 손아귀에 잡힐 만큼 흙을 떼어 동그랗게 빚는다. 둥근 흙을 손물레에 올려놓고 탕탕탕 납작하게 편다. 흙이 마르면 갈라지니까 앞 뒤를 자주 뒤집어줘야 한다. 손물레를 조금씩 돌려가며 둥글게 펴준다.
그리고 다시 흙을 떼어 지렁이처럼 길게 만다. 그 말은 흙을 손물레 위의 둥글고 납작한 흙 위에 켜켜이 쌓아준다. 한 줄 쌓고 나면 흙과 흙 틈을 일일이 손가락을 이용해 메워준다. 다시 지렁이 흙 자락을 만들고 둥글게 말아 올린다. 흙끼리 이어주고…. 반복, 반복 작업이다.
"선생님, 전 손물레 체질이 아닌가 봐요. 전기 물레 돌리고 싶어요."
힐끗, 저번 시간까지 내 손안에 있던 전기 물레와 백토를 돌아봤다.
"다양한 물레를 배워둬야 잔에 손잡이를 붙이는 방법도 알게 되고 또 큰 작품을 만들 수도 있어요."
'선생님 말씀은 알겠는데 재미없다고요.'
내 마음을 아셨는지 선생님이 유튜브 하나를 보여주셨다.
학생 하나가 바닥에 놓인 손물레로 그릇을 빚고 다른 학생은 그 손물레를 발로 열심히 돌려주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필요한 걸 만들어 내네요."
선생님과 마주 보며 웃었다.
처음엔 그냥 손과 흙으로 그리고 손물레, 발물레에 이어 전기물레까지 만들어 낸 선조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래서 결국은 기계죠."
다시 선생님이 유튜브에서 기계 작업하는 과정을 보여주셨다. 틀 안에 흙을 넣으면 둥그렇고 긴 쇠뭉치가 내려와 흙을 눌렀다. 사람은 넣고 빼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쇠뭉치가 굉장히 뜨거워요. 기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 급한 마음에 손을 갖다 대다가 다치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한 때 큰 도자기 회사에 다니셨다던 선생님 얼굴이 쓸쓸해졌다.
"재미없으셨겠어요."
"네, 너무 힘들었어요. 퇴근하면 신발도 못 벗고 현관에 주저앉아 있었어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아무 생각도..."
흙으로 지렁이를 만들며 선생님을 쳐다봤다.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세상은 지루하지만 인간의 시간이 억지로 기계의 속도에 맞춰지면 어떻게 될까?
시간과 함께 인간의 몸도 마음도 기계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걸까?
"자, 그러니까요"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선생님이 흙을 돌돌 길게 말아주셨다. 다시 쌓고 손가락 끝으로 이어주고...
'아, 지루해' 하다가 드라마 대장금이 생각났다.
중국 베이징에 살 때 한국이 그리워 DVD를 빌려다 다시 본 드라마였다. 그때 같이 드라마를 보던 아이들에게 했던 내 말도 떠올랐다.
"왜 장금이가 위대한 지 알아,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거야. 인생에서 '허투루'는 없어. 모든 시간이 소중한 거야"
어린 두 딸의 올망졸망한 눈동자들이 귀여워서 행복했는데 지금 난 조금 지루하다고 구시렁대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손물레 작업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손물레는 잠시 돌다 멈추고 흙을 돌돌 말아 쌓고….
나는 다시 과거로 떠났다.
대장금을 보면서 심각한 장면에서도 웃음이 나오곤 했는데 바로 자막 때문이었다.
대장금을 중국어 자막으로 大長今이라고 적은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영어 자막으로 대장금이 big long now였다. 중국어 자막만을 보고 영어로 옮긴 것이었다.
고유명사를 번역하는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자막을 만들다니, 헛헛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좋았다. 모든 문법을 무시한 대범한 이름.
'Big Long Now.'
지금
now는
나의 우주
느리게 돌아가는 손물레
지금 내 손안에 있다면
now 나의 우주
돌다 멈추는 손물레
답답해도 내 손안에
지금 나.우.
나의 우주
느리면 느린 대로
나의 인생
나의 우주
비교하지 마
서두르지 마
내가 가져야 할 것은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지 금
나의 우주
채울 거 채우고
버릴 거 버리고
지금 나.우.
있는 그대로 살면
길고 긴 지금을 살 수 있어
Long Now
크면 더 좋겠지
Big Long Now
- 소려의 못된 시 '대장금(大長今, Big Long Now)'
두 시간 만에 컵 하나를 완성했다. 초등학생 때 찰흙으로 빚었던 컵이 생각났다. 심통난 초등학생처럼 컵을 쳐다봤다. 소려라고 이름까지 새겼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구워놓으면 굉장히 예뻐요."
선생님이 달래주셨지만 나는 끝내 한 마디 했다.
"선생님 다음에는 전기물레 할래요. 얘한테는 미안하지만 또 하고 싶지는 않아요."
선생님이 헛헛, 웃으셨다.
나는 장금이가 되려면 멀었다. 갈 길이 멀다.
문법 찾아, 인생 찾아 'Long way' 해야 하나 보다. Big은 빼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