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 물레 수업 첫날, 선생님이 물었다.
"왜 물레를 배우고 싶으세요?"
"생각을 멈추고 싶어서요."
"흙 만지고 있으면 생각이 없어지긴 하죠."
"그리고…, "
햇빛 하나가 레모네이드 얼음 위에서 미끄러졌다.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요."
"시간의 흔적이요?"
해변가 모래 위의 발자국, 하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깊은 숨을 내 쉰 적이 누구나에게 있을 것이다. 그 흔적들은 아름다웠고 행복했다. 하지만 파도에 휩쓸려버리는 모래 위 발자국들, 바람이 몰고 온 눈보라에 휘몰아쳐버리던 눈 위의 발자국들.
난 덧없음을 느꼈고 덧없음은 습관이 되었다. 끝내 덧없음이란 덫에 걸려버렸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발자국조차 남기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사라질 건데 하며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존재는 소멸을 받아들였다.
껌벅이는 선생님 눈동자 위로 어떤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도 사라진 어떤 흔적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나처럼 사라지기를 선택했던 존재가 안쓰러웠을까?
"왠지 시적인데요."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를 지웠고 잠시 서로의 일상을 물었다.
"자, 이제 시간의 흔적을 만들러 가시죠."
흙과 친해지는 시간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손마디 어디에 힘을 주느냐에 따라 흙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흙은 내 마음처럼 중심을 잃고 흔들거렸다.
"잘하시는 데요. '똥 손' 아니신 데요."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셨다. 아까 똥 손이라고 엄살을 부린 효과가 나타났다.
"이것보다 잘하고 싶은데."
흔들거리는 흙을 움켜쥐고 투덜거렸다.
"처음부터 잘하시면 속상하시잖아요."
"왜요? 왜 속상해요?"
"이렇게 소질 있는 일을 왜 이제야 찾았을까, 하고요."
물레를 멈추고 선생님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아니요, 이제라도 찾았으면 좋겠어요.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요."
내 말에 선생님이 웃었다. 그러다가 내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닫고는 급하게 웃음을 거둬들였다.
흙을 만지며 생각했다. 난 왜 도자기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시간의 흔적이란 말로 내 물욕을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시 해변 위의, 눈 위의 발자국들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어디 발자국뿐일까? 지금 이 숨결도 떠도는 바람인 것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란 게 있을까?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욕심 아닐까? 아니,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까 두려워 주저앉아버린 건 아닐까?
물레가 돌아갔다. 흙 위로 내 손자국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발자국을 찍는 것이 아니었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찰랑거리며 다가오는 바다의 하얀 손끝을 느끼는 것이었다.
한 발을 옮길 때마다 포옥, 발을 감싸는 하얀 눈의 웃음을 마주 보는 것이었다.
시간의 흔적은 남기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었다.
돌아보기 두려워
버려두었다
사라질까 두려워
만들지 못했다
이제라도
시간의 흔적을 빚어
눈앞에 놓으면
마음이 벅찰 것 같아
가슴이 시릴 것 같아
하얀 시간의 흔적
햇빛 잘 드는 창가에 둬야지
난 시간의 흔적을 빚고
참 좋다
웃을 것 같아
내 시간의 흔적 속엔
사랑 원망
희망 절망
가득
담겨 있을 테니
햇살에 눈이 시린 듯
질끈 눈을
감아버리자
내 시간의 흔적 속엔
슬픔 기쁨
증오 용서
모두
담겨있을 테니
햇볕에 눈이 부신 듯
질끈 마음을
놓아버리자
난 시간의 흔적을 놓아버리고
참 좋다
웃을 것 같아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시간의 흔적이 되어 버리면
누군가가
좋았다
잠시 웃어주기를
그러다 가슴이 시리면
좋았다
눈을 감아주기를
부디
햇살에 눈이 시린 듯
질끈 버려 주기를
나란 시간의 흔적
- 소려의 못된 시 '시간의 흔적'
이제 와서 왜 도예를 배우려 드는 걸까? 공방에 오기까지 되뇌던 질문들이었는데….
가슴에 맴돌던 대답들이 물레 위의 흙처럼 흔들거리다 중심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