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모자 쓴 사람 머리(ㅎ), 팔 (ㅡ)을 뻗고 한쪽 다리는 90도로 세우고 한쪽 다리는 무릎을 접은 형상(ㄹㄱ)이….
한글이 상형문자도 아닌데, 가끔 낱자들이 제 얼굴을 하고 웃을 때면 묘하다.
흙은 제 모습처럼 본성이 겸손하고 변함이 없다. 어릴 적 흙 묻으면 더럽다는 소리를 들으면 왜 흙이 더러운 걸까 궁금했다. 흙에 물을 개서 친구들이랑 떡도 만들고 밥도 만들어 소꿉놀이를 하는데? 아무리 밟혀도 제 색을 발그스레 지니고 있는데?
요즘 도시 흙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스팔트에 깔려 숨이나 제대로 쉬고 있는지….
흙이 떠오른 이유는 노안 때문이었다. 책 읽으며 필사하는 것이 마음 달래는 방법 중 하나였는데 노안 때문에 책을 읽는 것도 필사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근육 마디가 저리면서도 내 손은 손에 쥘 무엇인가를 달라고 졸라댔다.
하도 손이 방방 뛰면서 불안해하니까 마음까지 '쟤 좀 어떻게 해주세요' 하면서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처음에 생각했던 건 나무다. 나무 공예를 해 보고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나무는 찼다. 거기에 육중한 무게와 딱딱한 몸. 톱을 들어야 했고 수많은 연장들이 필요했다.
대나무는 조금 쉬울까 싶어 동네 분 땅에서 자란 대나무를 잘라 이것저것 만들어 보았는데 타다닥, 시간 속에서 터져버렸다.
서둘러야 했다. 내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마음은 저 손이 한 대 팰 것 같다며 울먹였다.
만만치 않은 교육비 때문에 미루고 있던 도예 수업이 떠올랐다. 손가락은 재빠르게 인터넷 세상을 뛰어다녔고 생각보다 쉽게 도예 공방을 찾았다. 운전을 해서 40분 넘게 가야 했지만 내가 원하던 백자토를 쓰는 예쁜 카페 속 예쁜 공방이었다.
조카 나이뻘 되는 선생님도 좋았다. 이제는 고향이 돼버린 서울 말씨를 쓰셨고 15개월 된 예쁜 아이의 멋진 아빠였다.
‘도자기도 만들고 어여쁜 아기도 보고 시작하길 잘했어’ 했는데….
선생님 시연을 보고 물레 앞에 앉는 순간!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이런 것들 만드실 거예요."
선생님이 여러 모양의 작품들을 늘어놓으셨다.
그런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미래(未來)라는 한자가 생각났다.
흙 한 덩어리로 2 시간 동안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물레 돌리다가 흙에 손가락 살짝 갖다 대고 와르르 흙이 무너지면 선생님이 와서 잡아주는 지난날의 일일 클래스가 아니었다.
기초부터 단단하게. 흙을 느끼고 흙을 내 손으로 다뤄야 했다.
"손아, 이제 만족하냐?"
내 손에게 물었다. 손은 대답도 안 하고 흙 하고 노느라 바빴다.
만만히 봤다.
네가 이렇게 단단할 줄이야
물레에 너를 올리고
몇 바퀴 돌리면
네 정신은 혼미해지고
내 손가락질 몇 번으로 얻을 줄 알았다
내가 원하던 세상을
가소롭구나.
나를 이렇게 밟고 섰다고
세상이 네 것이더냐
넌 언젠가
내 손아귀 속 한 줌
편히 쉬고 싶다면 다 버리고 오너라
쓰레기는 싫다
맘껏 살다 활활 태우고 오너라
재만 남는다면 그땐
내 품에 안아줄 테니
- 소려의 못된 시 '흙'
흙과 어설픈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만날 수 없는 잎사귀를 그리다가 지고 만다는 상사화, 꽃무릇이 생각났다.
어느 먼 시간 속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그리던 누군가가 흙이 되어 여기 내 앞에 있는 건 아닐까?
안타깝고 갸륵해서 시간이 품어낸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이 흙의 단단함을 이 흙의 따스함을
그리고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이 흙의 눈물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