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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28. 2022

달빛과 손목

아침에 눈을 뜨니 드뷔시의 달빛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로 틀었다. 드뷔시의 달빛이 물방울이 되어 떼구루루 흘러내렸다.


내게 클래식은 배경 음악이었다. 지금도 많은 시간 책을 읽을 때 내 이명을 잠재워주는 수단일 때가 많다. 아침에 눈을 뜨면 kbs 클래식 FM을 틀어 놓고 잠들 때 끄곤 했다. 집안일을 하고 책을 읽으면서 무심히 시간처럼 음악을 흘려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멈추게 하는 피아노 연주가 있었다.

"누가 연주하는 거지?"

책 읽기도 글쓰기도 멈추게 하고 피아노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그 연주자가 궁금했다. 몇 번이나 손을 놓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일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그 연주자가 조성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는 모두 아름답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쇼팽의 폴로네이즈 영웅이 좋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곡이라 많이 들어봤지만 조성진의 영웅은 다른 어떤 연주보다 강하다. 세상의 틀과 자신의 틀을 막 깨고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순간의 깨달음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당신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가슴속을 흔들어 놓는다. 피식거리며 꺼지려는 불씨에 의지를 붓고 희망을 부채질한다. 떼지 못하던 발걸음을 가볍게 내딛게 하고 마음을 굳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또 한 곡.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달빛….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달빛이 밤을 타고 굴러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어느 산속 맑은 옹달샘에 내려앉는 달빛처럼 청아하다. 두 손에 담아 마시면 나도 달빛처럼, 옹달샘처럼 맑아질 것 같다.




깨달음이 더딘 나는 피아노가 좋은 악기라는 것을 참 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어설프게 알았다면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헛된 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한번 들은 노래를 잊지 않고 따라 불러서 음악을 모르는 어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고 한국 가곡을 다 다른 곡으로 한 시간 넘게 불러 친구 입을 떡 벌리게도 했지만 피아노는 처음부터 싫었다. 아니, 싫어하게 되었다.


'피아노'하면 선생님한테 손목을 맞았던 기억부터 떠오른다. 형제가 오빠, 남동생 하나씩이었던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피아노가 필수 교과목이 되었다. 아무한테나 배우면 안 된다는 과제가 엄마한테 떨어졌고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피아니스트였다는 선생님 집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 집은 마당이 넓은 이층 양옥집이었다. 그랜드 피아노도 한 대 있었던 것 같은데 난 그 근처에도 갈 수 없었고 이층 구석에 박혀 있던 피아노 앞에 앉곤 했다.

도레미를 치기도 전에 선생님은 내 손목을 나무 막대기로 치기 시작했다.

"손가락 오므리고…, 계란 쥐듯이. 팔꿈치 들어야지. 피아노에 기대지 마. 손목 들어, 손목. 손모옥~!"

선생님은 끝내 손목에서 비명을 지르곤 했다. 선생님 꿈은 원래 성악가였을까? 이루지 못한 꿈을 나에게 질러 대는 것일까?  나는 움찔거리면서 피아노 건반을 뭉개곤 했다. 피아노 수업이 끝나면 '손목'이란 소리만 귀에 쟁쟁거렸고 내 가는 손목은 빨간 줄로 욱신거렸다.


어느 순간 선생님은 내 옆에 오지도 않고 피아노 뒤 책상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를 가끔 힐끔거리면서. 그러면서도 엄마가 수업료를 들고 오면 내 칭찬을 했다.

“소려가 음악적 감각이 있어요. 이 단계만 넘어서면 잘할 거예요.”

그럴 때는 영락없는 피아니스트였다.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은 곱게 포갠 채 '우아의 극치'를 보였다.


그렇게 일 년을 넘게 다녔던 것 같다. 피아노 수업을 관두게 된 이유는 나의 부진한 성적 탓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수학선생님을 하시면서 병행하던 사업이 망했기 때문이었다. 풍족하던 수입이 줄어든 탓에 집안 분위기는 어두웠지만 피아노를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햇살 한줄기가 깨진 벽을 타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피아노 앞에 앉으면 손목부터 손바닥과 같은 높이로 맞춘다.

어릴 적, 어른들 성화에 피아노 앞에 앉으면 피아노 좀 칠 줄 안다는 어른이 말하곤 했다.

"어머, 자세가 됐네. 손가락과 손목 선 좀 봐."

그러면 엄마가 한마디 거드셨다.

"얘가 제대로 된 피아니스트한테서 배웠거든요."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칠 수 있는 곡은 '나비야 나비야'와 '고향의 봄'이 다였다. 그나마도 손목이 흔들릴까 봐 박자가 삐그덕거렸다. 반주는 쿵 짝짝 사분의 3박자와 쿵 짜자작 사분의 사박자를 넘어서면 손가락들은 손목에 걸려 넘어졌다.

그 당시 바이엘을 겨우 끝내고 체르니로 넘어갔을 때는( 습득해서가 아니라 시간 상 넘어갈 때가 되어서) 이 세상 작곡가들과 피아니스트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들이 계획한 음모에 내가 말려들어간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음표를 만들고 악보를 만들고 거기에 괴물 같은 피아노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피아노가 뚜껑을 쿵쾅거리며 하얀 이빨과 썩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어느 날은 피아노가 그 무거운 몸으로 폴짝 뛰어올라 나를 콰광 덮치고는 또로로롱 즐거워하기도 했다. 내 가엽은 손목만이 피아노 밖에서 허우적거렸다.


아버지 사업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을 때는 피아노를 배우러 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엄마가 피아노 배우러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울고불고 싫다고 정말 '난리를 쳤다'. 며칠을 밥도 안 먹고(원래 밥은 잘 안 먹었습니다만) 울자 아버지는 피아노 앞에 앉아 멋지게 손을 휘날리는 딸의 모습을 포기하셨다.


그래서 나는 두 딸에게 피아노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큰 애는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다. 학원 선생님한테 전공을 해보겠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딸은 그냥 피아노 치는 시간이 즐겁다고 했다. 학원 선생님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듯 나올 필요가 없다고 했고 딸은 본격적인 수험생의 길로 들어섰다. 집에 있는 피아노 앞에는 어쩌다 가끔 앉았다.

둘째는 나를 닮아서인지 피아노를 싫어했다. 혹 나처럼 학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물으니 외어서 치는 건 좋은데 악보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날에서야 나도 그랬다는 사실 하나를 더 깨닫게 되었다.


오선지에 도레미를 열심히 그려 넣으며 연습을 했지만 악보 속 음표들은 제 맘대로 떠다니는 물음표들 같았다.

"나 잡아봐라."

"너는 레야" 하며 뛰어가 붙잡으면 옆의 녀석이 "그럼 나는?" 하며 날아다녔다.


큰애가 분가하고 집에 있는 피아노를 써볼까 하는 생각에 남편이 좋아하는 '캐논 변주곡'을 연습해보기로 했다. 놀러 온 큰애에게 음계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높은 음자리표는 알겠는데 낮은 음자리표는 모르겠어."

큰 애는 오선지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엄마, 얘는 여기가 도예요."

"아니, 그건 아는데 치다 보면 옆에 있는 애들이 헷갈려. 그냥 적어주라."

큰딸은 연필을 집어 음계를 적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건 알겠고 거기처럼 갑자기 음표 위치가 달라지는 데 있잖아. 그래, 바로 거기…."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 캐논 변주곡을 한 시간씩 한 달 정도 연습했을 때였다. 여전히 손목이 내 손가락들을 걸고 넘어갔지만 오기가 생겼다. 이 곡만은 쳐보자.

두 달이 다 돼 갈 무렵이었다. 작은 깨달음이 머리를 쳤다.

"어느 누구도 나를 괴롭히려던 게 아니었구나. 이런 음을 만들기 위해 음악가들은 끝없는 고민을 했고 이런 음표라는 언어를 만들어냈구나. 이 악보라는 음악의 언어는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내고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도구였구나."

아,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피아노를 덮었다.


난 그들의 세계에서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내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를 볼 때마다 '너는 안돼' 하며 나를 힐끔거리던 피아노 선생님의 눈동자가 생각났고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온몸이 쭈그러들었다. 그리고 취미 생활조차도 못하게 삐끄덕 거리며 떨고 있는 내 손목을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 내 손목아, 우리는 우리들의 언어를 나누러 가자. 피아노는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면 돼. 넌 할 만큼 했단다. 맞을 만큼 맞았어."


나는 드뷔시의 달빛은 달빛대로 내 손목은 손목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쓸 수 있는 나의 언어를 더더욱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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