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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22. 2022

시골의 경계

여의도 선착장에는 초가을이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유학하는 6년 동안 유람선을 한 번도 타지 못했다는 안동 친구를 위해 여의도에 갔다. 유람선 탑승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설렁설렁 한강변을 걷고 있었다.  네 명 중 한 친구가 천천히 손을 올리며 물었다.

"저기 나무에 열매가 달려 있네. 저거 뭐야?"

내가 대답했다.

"모과."

"응, 그러니까 소려야 저기 저~ 나무 있잖아. 그 노란 열매가 뭐냐고?"

"그러니까 모과!"

친구가 고개를 돌려 멀뚱 나를 쳐다봤다.

"모~과~. 모과라고!"

나는 입을 동그랗게 굴려 말을 했고 입술을 읽은 친구가 말했다.

"아, '뭐가'가 아니고 모과~."

나이가 들면 귀를 먹는 걸까 머리를 먹는 걸까? 의도치 않게 '아줌 개그'를 펼치고는 친구와 나는 너털 웃었다.

나무 밑으로 가보니 모과들이 바닥에 굴러 다니고 있었다. 모과를 들고 가는 사람은 없었다. 약을 친다는 것도 알겠지만 그런 열매를 들고 가도 절도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도자기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 어귀에서 모과를 따고 계시는 동네분을 만났다. 다른 모과나무들과 달리 그 모과나무는 열매 크기도 일정하고 색깔도 유난히 고와서 길을 지나다닐 때마다 눈길을 끄는 나무였다. 두세 개 따다 집에 놓고 싶었지만 주인이 누군지 아는 지라 나뿐이 아니라 동네 어느 누구도 아무도 함부로 따지 않았다.

"사장님 모과가 정말 예뻐요."

말 한마디에 사장님 손에 들려 있던 모과 두 알을 얻었다. 손에 쏙 잡히고 샛노란 것이 어느 양가집 규수처럼 고왔다.


요즘 우리 동네는 감이 풍년이 들어 검은 가지 끝마다 주홍빛 감들이 전구알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다. 모과나무들도 그에 질세라 노랗고 큰 전구알들을 매달고 달빛에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함부로 따지 않는다. 그 땅 주인이 누구고 그 열매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누구는 땅의 주인이 어딨고 자연의 주인이 어딨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골에 살다 보면 그 사람들의 정성과 노고를 보게 된다.

감밭, 복숭아, 매실 밭 등 모든 밭은 일 년에 4, 5번 정도 풀을 베어줘야 한다. 때로는 뱀에 물리고 벌에 쏘이고 예초기 날에 베이기도 한다. 그리고 농약과 영양제를 3번에서 많게는 9번까지 쳐줘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시간이고 노동이고 정성이다.  

그런데 철조망이 없다고 도시 사람들이 들어와 한 개쯤이야 하며 따간다. 그 '한 개쯤'을 딴다고 주위에 심어놓은 고사리를 밟고 가지를 부러뜨리고 나무껍질을 벗겨가면서. 그렇게 딴 한 개를 들고 그 동네 사람들의 길 한가운데 차를 세워놓고 유람을 간다. 그리고 길을 가다 철조망이나 철문을 보면 한마디 한다.

"사람이 다니면 얼마나 다닌다고 야박하게 철문까지 달았대?"

남의 이야기하듯 했지만 어쩌면 시골로 내려오기 전의 내 모습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시골에 오고 나서야 그냥 지나만 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에 제대로 자리를 잡겠다는 생각에 작년에 땅을 샀다. 700평이 조금 안 되는 땅에는 구찌뽕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었고 남편은 올해부터 그 한 편에 오이며 토마토를 심었다. 토마토는 산짐승들이 거의 다 따먹었지만 오이는 노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밭에 다녀온 남편이 말했다.

"노각 큰 거 두 개랑 수세미 제일 큰 거 두 개가 사라졌네요."

수세미는 내가 설거지할 때 쓰겠다고 남편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

"동네 분들이 따 가셨나?" 하는 남편에게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동네 분들은 아니야. 차라리 그분들이면 다행이겠지만."

동네 사람들은 함부로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소용을 알기에, 혹시 따가셨더라도 만나면 말씀을 건넨다. "그때 내가 그 거 따갔네요." 하면서 인사를 건네신다. 그리고 자신의 밭에서 감자며 고추며 필요한 거 있으면 따가라고 말씀하신다.

철망이 없다고 문이 없다고 다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는, 자신이 편할 때만 자연을 사랑하는 가짜 자연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들에게 시골의 경계는 없다. 때로는 인간의 기본적인 경계도….


봄이었다. 마당에 핀 불두화가 희고 탐스러워서 몇 송이 꺾고 있을 때였다. 우리 집 남쪽 길에 승합차 한 대가 서더니 6,70대로 보이는 남자들 5, 6명이 내렸다. 차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묻지도 않고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못마땅했지만 혹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좋은 얼굴로 "어떻게 오셨어요?" 물었다. 그런데 그중 한 남자가 성큼성큼 돌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집은 거의 열려 있지만 동쪽 편에 대문이 있고 남쪽으로는 문 없이 축대와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남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돌계단을 올라오더니 "아, 집이 참 좋습니다"하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내가 얼굴을 굳히고 그 사람을 노려봤지만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뒤에 서 있던 남자들도 눈치를 보다 올라올 기세였다. 그때 연못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물 새는 구멍을 찾고 있던 남편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누구십니까?"

그다음 남자의 행동이 더 황당했다. "아, 아뇨. 지나가는 길에…" 하면서 남자는 황급히 돌계단을 내려갔다. 그 밑에 있던 남자들은 '우린 안 올라갔어요' 하는 표정을 짓더니 뒷짐을 지고는 마을 길을 걸어내려 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차를 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쳐다봤다.


그 후 나는 남편이 집에 없을 때는 마당에 나가지 않는다. 어쩌다가 나가더라도 차 소리나 인기척이 나면 집안으로 뛰어들어와 문을 잠근다. 그리고는 미어캣처럼 남쪽 창가나 2 층 테라스에 올라 누가 왔나 두리번거린다. 동네 사람이면 그제야 마음을 놓지만 마당에 나갈 엄두는 다시 나지 않는다.




오늘은 소설(小雪), 긴 가뭄 끝에 바라던 비가 추적거린다. 밤이 깊어지면 이 비는 작은 눈송이가 될 수 있을까?

난로 옆에 앉아 찬 발을 녹이며 은은히 풍겨오는 모과 향기를 맡는다. 노란 모과 두 개를 앞에 놓고 생각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잘도 굴러다닌다. 경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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