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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20. 2022

바나나 전투

엄마로 산다는 건…


"엄마?"

눈을 뜨니 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잠이 들었는데 아이가 그새 깼나 보다. 이불을 들치고 내 배를 툭툭 쳤다. 아이가 침대를 기어올라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불을 덮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 배 고파요. 밥 주세요."

첫째가 두 돌을 갓 넘겼을 때였다. 둘째는 태어나기 전이었다.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일어난 지 오래되었나 보다. 서둘러 일어나 계란밥을 해주었다. 아이가 오물오물 밥을 먹으면서 나를 보며 웃었다. 엄마가 자기 밥 잘 먹는 걸 좋아하는 걸 안다.


첫째는 또래보다 말이 빨랐다. 내가 아픈 탓이었다. 

나는 첫째를 낳고 한동안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병원에 가보니 골반이 갑자기 심하게 벌어져서 근육에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진통제를 먹으면서 뼈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거의 1년을 누워 지냈다.

친정어머니가 오셔서 살림을 해주셨고 나는 제대로 아이를 안아주지도 업어주지도 못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누워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을 해줬다. 아이가 어어, 하며 손가락질을 하면 '저건 냉장고야. 그 문을 열면 먹을 것들이 가득하지. 윗 칸은 냉동고라고 해, 냉동고에는….' 하며 이야기를 종일 해줬다.

첫째는 돌이 지났을 때부터 문장 두 개를 정확히 말했다.

"엄마, 전 지금 응가는 안 할 거예요. 쉬만 할 거예요."

변기에 아이를 앉히고 나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내 아이가 천재인가 봐?!"

다행히 영재 교육을 시키겠다고 뛰어다니지는 않았다. 뛰어다닐 기력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아이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아이가 밥을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예뻐서 마주 웃고 있자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내가 몸이 좋아진 후에도 안아달라고 보채지 않았다. 아빠가 오고 나서야 안아달라고 손을 번쩍 들었고 할머니 등에만 붙어서 업어달라고 졸랐다.

그날은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해주고 싶었다.

"우리 마트 갈까?"

아이가 입에 밥풀을 묻힌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동자가 망울망울 반짝였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시간이라 마트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물건들 진열하는 직원들이 손님들보다 더 많았다. 아이를 카트에 태우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멀리 매장 한가운데에서 직원 두 분이 바나나를 진열하고 있었다.

"바나나 사줄까?"

아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진열대에는 바나나가 몇 송이 없었다. 그중 실해 보이는 것을 골라 썩은 것은 없나 살펴보았다. 그런데 옆에서 바나나를 카트에 담고 있던 여자 두 명 중의 하나가 내 손에 들려 있던 바나나를 낚아채갔다.

나는 갑자기 바나나를 뺏긴 원숭이가 되어 어리둥절했다. 여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바나나를 카트에 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오히려 바나나를 정리하던 직원 두 명이 놀라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바나나를 손에 든 채로 한 사람은 차렷 자세로. 그분들의 경직된 표정을 보고 아침부터 큰 소리 내기 싫다는 생각에 돌아섰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아이에게 괜한 걸 묻는다 싶으면서도 말이 나왔다.

"싸울까?"

아이가 입술을 내민 채로 고개를 흔들며 '아니요' 할 줄 알았다. 정말로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대답이 단호했다.

"네! 싸워요."

나는 어쩔 줄 몰라 그대로 멈춰버렸다. 내가 한 말도 있고 아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기, ^^아! 싸움은 하는 게 아니라 말리는 거야.' 할 수도 없었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구나, 싶었지만 때는 늦었다. 아이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 싶어졌다.


"그래, 싸우자. 그런데 놀라서 울면 안 돼."

"네."

아이는 카트를 두 손으로 붙잡고 이빨을 꽉 물고 몸을 앞으로 향했다.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토톡, 토도독.

나는 아이가 잘 볼 수 있게 카트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끌고 바나나 진열대로 향했다.

5m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내 머리는 복잡했다. '여자들이 싸우면 머리채부터 잡는다던데 머리를 안 잡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카트가 밀려가서 아이가 다치면 안 되니까 진열대 옆에 카트를 고정시켜야겠다.'


그 당시 나는 키 162cm에 몸무게가 42kg이었다. 만삭 때도 50kg을 넘지 못해서 주위 사람들을 걱정시켰다. 태풍이라도 오면 친구와 가족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바람 많이 부니까 나가지 마라. 너는 날아간단다."

그렇게 농단 반, 걱정 반을 하게 만드는 몸이었다.


내가 다부지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아이 눈에서 토도독 불꽃이 튀는 것을 젊은 남자 직원 두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머리채를 안 잡히기 위해 바나나 한 송이 정도는 집어던질 각오로 걸어갔다. 카트를 안전한 곳에 세운 후 입을 열었다.

"저기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손에 있는 바나나를 뺐어가시면 어떡해요."


직원 한 명은 아까처럼 바나나를 안은 채로 다른 한 명은 차렷 자세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이 싸움을 어떻게 말려야 하나 걱정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일행인 한 여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나나만, 바나나만 담고 있었다. 내 손에서 바나나를 뺏어갔던 여자도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바나나를 집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바나나가 얼마 없는 줄 알았어요."


아이와 나는 동시에 '응?' 했다. 뭐지, 싶었지만 내가 그 여자의 머리채를 잡을 수는 없었다.

다시 돌아서는데 기분이 묘했다. 아까보다 기분이 더 나빴다.

싸움을 했는데 싸운 것 같지 않았고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 않았고

잘못했다고 하는데 사과를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바나나가 얼마 없으면 남의 손에 있는 걸 뺐어가도 된다는 건가?

원숭이 같은 사고방식에 휘말려 나도 원숭이가 된 것 같았다.


아이 표정도 좋지 않았다. 눈에서 토도독 거리던 불꽃은 사라졌지만 입은 여전히 나와 있었다. 어떻게 아이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고객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바나나를 진열하던 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 사람 손에는 아까처럼 바나나가 한 송이 들려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그 직원이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뇨. 직원 분이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요. 저 사람이 이상한 거죠."

"저희가 빨리 일을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아녜요. 괜히 직원 분만 곤란하게 해 드린 것 같아 제가 죄송하네요."

왜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하나, 다시 바나나를 담고 있는 여자들이 미워졌다.

"이거, 죄송해서 드리는 거예요."

직원은 들고 있던 바나나를 우리 카트 속에 넣으며 말했다.

"아, 아뇨. 됐어요. 이러려고 그런 거 아녜요."

"알죠. 그런데 저희가 죄송해서요. 아이한테도 미안하고요."

직원은 나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아이를 보며 말했다.

"꼬마야, 미안해. 아저씨가 대신 사과할게."


직원이 돌아가고 나서도 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나나를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트가 흔들거렸다. 아이가 카트에서 몸을 돌리겠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야, 왜?"

"바나나 주세요."

아이는 두 손을 포개 내 눈앞에 놓았다.

"아무리 공짜로 주신 거라고 해도 지금 먹으면 안 돼."

"알아요. 지금 안 먹어요. 바나나 주세요."

바나나를 카트에서 꺼내 아이 무릎에 올려놓았다. 아이가 바나나를 두 손으로 감싸더니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됐다.' 나도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아이에게 그날 식사는 바나나였다. 한 개 두 개, 질리지도 않는지 종일 붙들고 다니면서 껍질을 흔들고 입을 오물거렸다.

"그만 먹어! 설사한단 말이야. 밥 먹어야지."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함박웃음으로 오히려 나를 웃게 만들고는 바나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퇴근 시간, 아빠가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식탁 위의 까지 않은 바나나를 한 개 들더니 급하게 문 앞에 섰다.

"바나나 바나나."

아이는 아빠가 들어서자마자 바나나를 높이 들어 건네고는 안아달라고 폴짝거렸다.

아이를 안고 바나나를 손에 든 남편이 물었다.

"마트 다녀왔어요? 애 데리고 힘들었을 텐데."


남편은 씻지도 못하고 그날 있었던 바나나 전투의 전말을 들어야 했다. 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이는 아빠 무릎에 앉아 바나나를 오물거렸다. 아빠 입에 바나나를 넣어주면서.



엄마?


아이가 태어난 날

가슴 위에 얹힌 너의 체온

내가 네 엄마란다 작고 약한 너를 보며 말했지

엄마 불러봐


아이가 입을 오물거리던 날

방 한 편 작고 고운 너의 숨결

이 아이가 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하고


아이가 처음으로 나를 불러주던 날

우주 저 끝까지 퍼지던 너의 목소리

아이고 예뻐라 소리밖에 못하는 나를 너는 불렀지

엄마 엄마


아이가 커서 종일 나를 부르던 날

엄마 왜 엄마 왜 엄마마! 왜애액?

그만 불러라 나 네 엄마 맞다 하는 나를 보며 말했지

엄마?


           - 소려의 못된 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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